하나님 주신 직장 복이 많아서 참 오랜 기간 한 회사에 몸담았었다.
공교롭게도 정년까지 근속기간이 예수님 생애와 같은 33년이니 그도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기연의 복이겠다.
유년주일학교 시절 숙제가 있었다.
일주일 동안 '거짓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세어오라.' 는 것.
꽤나 어려운 숙제였다.
거짓말이라는 거야 상황 모면용으로 때 모르게 하는거지 의도하고 하는 것이 아니니 그걸 세고 있다는 게
말이되는 일인가 말이지.
어쨋든 거짓말을 하고 세고, 또 하고 또 세고 그랬던 모양이다.
다음 주일에 숙제 검사가 물론 있었다. 아이들 마다 다 숙제를 제대로 한 모양.
내 차례가 되었다. "33번이요."
진짜 세었던 숫자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넌 예수님 나이와 똑 같은 숫자 거짓말을 했네."
그거야 단순 숙제 검사 차원의 피드백이었을 뿐이었을텐데, 그 땐 어찌 민망하던지...
그 뒤로 비슷한 주일학교 일화.
그 땐 글짓기를 참 많이 시켰었다. 지금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난 조금 문제아적인 경향이
농후했던 모양인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데, 그게 정말일까?"
글짓기 한 문장에 썼었다. 그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넌 예수님 제자 도마랑 꼭같은 생각을 했구나."
그도 야단칠 의도는 물론 아니었고, 단순히 글에 대한 짧은 평이었고, 아마 "예수님은 진짜 부활하셨단다." 라고
의문을 정정해 주셨을 것이다.
이건 진짜 오래 전의 일이었음에도 너무 생생한 기억이고 잊혀지지 않아 말 할 수 있는 일화들이다.
근데 사람들은 자꾸 잊혀져가기도 하고, 잊을 환경이 되기도 하고, 오래 무관심 속에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있다가 갑작스런 만남을 겪기도 한다.
직장 후배 본인의 부고를 접한 건 일주일전, 본인의 전화번호와 이름으로
본인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생소한 사람이 후배의 부의를 슬프게 전해왔다.
난 그 친구에게 부의금을 전하지 않았다. 바이킹족들은 전사가 가는 길에 노자돈하라고 동전을 눈 위에 얹어
보냈다고 그러던데, 난 아직 그 친굴 보내지 않아서였을지? 어차피 그 친구 가는 길 배웅하러 갈 처지가 못
되었던지라 부의금을 전하는 게 영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그 후배는 내게 잊혀져야 할 존재로 마지막
이름을 보내왔다. 처음 만날 때 서먹했던 얼굴이 카톡 프로필에서 웃고있는채로...
그 후 일주일.
창 긴 모자를 단정히 쓴 코 큰 노친네와 두 분이 카페 문을 들어섰다.
모자를 쓴 그 사람이 "아니 이게 누구신가? 여기서 진지를 구축하고 계셨습니까?" 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같이 함빡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나누면서도 ' 이 사람이 누굴까? 어디선가 봤는데...' 싶었다.
주문한 차를 내어주고서도 몇 번을 슬쩍슬쩍 훔쳐봤는데도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인연이래야 33년 근속한 전 직장 동료?
울산노회 남전도회원?
아니면 동문회 동문 선배나 후배?
이럴 땐 참 기억력의 한계가 야속하다.
궁금 궁금해 하면서 차를 준비해서 "커피 나왔습니다." 했는데, 마침 그 이가 커피를 가지러 왔다.
기회가 많지 않다. "아직 여전한 현역이신 모양입니다, 유니폼을 입으신 걸 보니..." 라고 인사를 다시 건넸다.
"뭐 하던 일이니까 계속 하는거지요."
"명함 한 장 주세요." 했더니 잘 정돈된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아! 이 사람이 그 사람?!" 이름 석자와 함께 20년 전 그 사람의 얼굴이 그제서야 또렷히 로 보였다.
확실히 늙어있기는 했지만...
90년 후반 무렵 퇴직을 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던 사람이고,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어었다.
근무 부서는 달랐어도 같이 '경영기획실' 이라는 울타리에서 근무했었는데...
잊혔던 사람을 이렇게 다시 알게되었다.
처음 알았던 그 때 처럼.
그 이도 나가면서 명함이 없어 건네지 못한 내게 물었다.
"아 진짜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데, 진짜 죄송합니다. 이름이 기억 나질 않습니다."
그 이에겐 나도 잊힌 존재였다.
"예 전 김자 유자 인자 씁니다." 그랬더니 "아 맞다. 김유인씨."
그렇게 우린 다시 알게되었고, 기억 가운데 서로 들어갔다.
잊힘은 기약이 없어서 앎이란 것도 오랜 무관심과 무관계 속에선 잊혀지기 마련이다.
오랜 떨어짐이 지속되다가 이 땅에선 더 이상 못 볼 사람이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잊혀진다는 것은 그래서 둘 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흐름 속에 존재하는 관계의 문제이고,
지속의 문제이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건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