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제위께 나이지리아에서 보내는 글이 혹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부로 업무인수인계 소장님 보고 끝내고, 본사 송부함으로써 행정적인 업무이관은 종료가 되었습니다.
확정 기일이 없이 ‘연장 근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할 때는 ‘어쨌든 가야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이다만,
막상 복귀 일정을 정하고 나니까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되는 것이 못내 마음 가벼운 것만도 아닙니다.
1년 하고 또 1개월 그리고 반달을 해외현장에서 근무한 폭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 짧은 기간이었지요. 그러나 남다른 현장파견 배경이 있다 보니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도 잠시간 일단의 시름은 일에 묻어두기로 하고 ‘현장지원부장’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로 정리를 새롭게 했습니다. 자랑 같지만 있는 동안 ‘현대의 기상을 한층 높이는 일’과 ‘직원들의 편의도모’라는 측면, 그리고 ‘지원과 관리(통제)”의 모호한 경계를 잘 설정 할 수가 있었습니다.
현장 생리를 아시는 분들이야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현장일 이란 것이 모두 현장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지원’이란 명칭으로 현장을 관리할 여건이 되질 않지요. 나 보다 앞서간 전임자들이 있는 터라 그 위에 새로운 업무 질서를 잡아 간다는 것이 쉬운 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현장 공구장과 본의 아닌 마찰을 피할 수가 없었고, 최종적으로는 ‘현장지원의 입장’을 현장 소장도 이해하는 선까지 위상을 잡아 놓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아마 이 현장하고 살짝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주변에 바라보이는 것들이 다 정겹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지요.
최근 이외수의 ‘외뿔’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주 읽기 쉽게-책장이 무지하게 잘 넘어가게- 쓴 책입니다.
작가 자신을 ‘도깨비’로 상정하고, 화자(話者)는 춘천 의암호에 살고 있는 ‘물벌레’를 내 세웠습니다.
주인공 도깨비는 ‘어디 가십니까?’라는 화두를 가지고 세상에 왔다고 하네요.
짧은 글 줄에 많은 시사가 있습니다. 아마 이 책을 통해서 난 이외수란 소설가를 좋아하게 될 모양이오.
그와 함께 달팽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테고, 아마 나팔꽃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화지요. 내 맘이 아주 편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이용한 상식 한 도막
‘도깨비는 한자 道加被에서 유래 했고, 加被는 부처나 보살에게서 어떤 능력을 얻었을 때 쓰는 말’ 이랍니다.
잠깐 짬을 내서 이외수의 외뿔을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달팽이의 독백을 읽으면서, 난 달팽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 같고, 나팔꽃이 좋아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용 – 달팽이의 독백>
저는 그리움이라는 불치병을 앓으면서 행려병자처럼 세상을 떠도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팔꽃이 멸종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세상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살아 갑니다.
달팽이 입니다. 물 바깥에서 살지요. 땅바닥에 배를 깔고 무사태평 여유자적 하는 마음으로 여행이나 다닙니다. 언젠가는 물속 세상도 한번 여행해 보고 싶습니다. 동물보다 식물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이었지요. 저는 여행길에서 어떤 덩굴 식물 한 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몇 배 느린 동작으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식물이었습니다.
그 식물은 땅바닥을 며칠 동안 기어 다니다 썩은 나무 둥치 하나를 붙잡더니 필사적으로
위로만 기어오르기 시작하더군요.
여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행에서 돌아 오는 길에 다시 그 식물을 만났습니다. 그때 우연히 썩은 나무둥치 위를 쳐다보게 되었지요.
놀랍게도 그 식물은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도 피워 올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안간힘을 다해서 올라 왔을까요. 그리움 때문입니다.
그 해 여름날 보았던 꽃 한 송이를 저는 지금도 짝 사랑하고 있거든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어떤가요?
달팽이의 求道 내지는 그리움이란 것의 진정성이 혹 보이시나요?
달팽이와 나팔꽃, 그리움과 기어오름, 또 기어오름과 꽃짐… 이런 대조와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2009. 2. 19. 나루
나루 대형,
귀국하신다는 예정은 비공식적으로 들었습니다만,
곧 귀국하신다니 환영과 안도의 마음과 함께 떠나실 때 무겁던 우리들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네요.
나이지리아로 보내는 마지막 답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아침 출근 직후지만 몇자 답장 보냅니다.
마흔 중반이 지나서 부터는 1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지구 공전 주기
- 춘하추동의 변화
- 정기 모임 및 행사 (송년회, 정기총회, 진급, 년말 정산, 건강진단/신체검사, ETC)
- 그외
사실 우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 1년이라는 시간단위 100개를 채 못 채우고 가는 것이 인생이지요. 일년에 담배 한 개피 핀다고 치면 다섯갑을 못피고 마칩니다. 나이를 시속에 비유하듯이 나이 들수록 점점 빨라지는 1년이라는 시간의 체감 길이, 그러나 그것은 때로는 무척 힘들고 긴 시간일 수도 있겠지요.
나루 형의 1년이 그랬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조직을 맡으시든지 그리하셨듯이 서아프리카 고도에서 굳건한 현중의 정신과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으리라 믿습니다.
그간 수고 많으셨고 고생하셨습니다.
귀국하시면 1주일 내에 반갑게 뵙도록 하겠습니다.
엘바섬을 뒤로하고 파리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맞이하는 파리지엔의 마음으로..
어느 더운 날 우리가 보았던 그 한 송이 나팔꽃을 그리는 마음으로..
아니 온 정원에 흐드리지게 핀 나팔꽃 다발을 키워낼 희망으로..
2008. 2. 19. 와은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