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카테고리를 정해서 어디에 소속시켜야 할지 모를 글이 있다.

오늘 쓰는 글 같이 낙서 같은 글들...

오늘은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말을 좀 하고 싶은데. 재직시절 경영혁신 중심의 업무를 주로하면서 그 업무에 종사하는 기간 내내 슬픔아닌 슬픔을 당했던 기억이다. 한 마디로 '쓸데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니까 조직의 협조가 있을턱이 없다.

심한 경우 임원 행동변화 프로그램을 진행 할때는 목적에 따라서 캠코더로 직원들의 소리를 담아서  '이런 임원을 원한다' 라는 것을 방영해 주었더니, 뒷 모습과 목소리만 나오는 영상으로 보여줬는데(교육목적상),  교육이 끝나고 현업으로 돌아가자 마자 해당 직원을 찾아서 혼찌검을 냈다고 했다. 그 이후 그 자료는 방영을 중지했고, 당초 전 임원을 대상으로 했던 과정도 흐지부지 중도에 끝내고 말았다.

 

당시 우리가 참 부러워 했던 것은 경제전문지에 기고를 하는 임원, 유명 단체에서 유치하는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는 임원, 학술대회나 포럼에서 주제를 발표하는 전문성을 가진 임원 등 존경할 만한 임원들이 많기를 바랐으나 그 기대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 때가 벌써 1994년에서 1996년 사이니까 세월은 참 멀리도 날 끌고 왔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는 그 조직의 임원상이 크게 바뀐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사실 그건 그 안에 깊이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일 뿐 많은 고민들이 있을 줄 알고, 또 전문성 또한 대단할 것은 자명하다.

적어도 조직에서 1%내에 소속되는 훌륭한 분들이니까.

문제는 그 분들끼리 같은 기준을 공유하지 못하는 모양인 듯, 경영진이 바뀌면 경영기준이 바뀌는 모양으로 보여서 일관성이랄까 전통이랄까 이런 의미가 혹 없는 것은 아닌지 싶은거다. 

내가 옳다고 내 소리만 내는 풍토에서는 기업문화의 단절이 올 수 밖에 없고, 장기적으로는 그 조직의 색깔을 찾을 수 없게된다.

위대한 기업들은 저마다 그들의 독창적인 기업문화가 있었다.

 

기업문화는 일하는 풍토를 결정짓게되고 풍토는 곧 업무처리 기준이 되기때문에 사람이 바뀐다고 기준이 이리 저리 쏠려다니질 않는다.

GE가 아직까지 우량기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조직은 3대 사장이 바뀌면서도 잭웰치의 경영방침을 그대로 지키면서 그 위에 발전적이고 독창적인 신임 CEO의 생각을 얹으면서 폭은 적을지라도 도약의 전기를 마련해 갔다.

기준이라는 것은 약속이 아닌가?

또 전임자의 결정을 한 순간 번복해 버리는 풍토라면 전후임간 단절에서 생기는 성김은 무엇으로 메꾸어 나가야 하나?

분명 조직 어딘가에서는 이런 성긴 틈으로 외풍이 많이 작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새벽마다 어깨가 시리고 자고 나면 코가 막히는 현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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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쉬움

 

1994. 8. 29

 

박 홍 총장(서강대)의 주사파 발언에 대한 추궁이 계속되고 있다.

정작 국민들은 그 발언에 대해 어떤 종류의 불안감보다는 있어서는 곤란한 일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데...

모르긴 해도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형이나 누나 손을 잡고 밤길을 걸으면 별로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과 같은 그런 감정일 것이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마치 국법의 질서나 존재의 틀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는 양 난리를 치고 있다. 역사 속에 한 사람을 죽인다고 하자. 그 주검을 딛고 올라서면 천지(天地)가 보이나?

의연하지 못함이 비단 그들의 냄비 물끓듯하는 쇼맨십 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지각있는 국민들을 우매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냐 아니냐에 대한 사실의 규명’과 ‘국법질서 차원의 엄단’이라는 처방이 유효하다면 박 홍 총장은 용기 있는 학자다.

검은 세단에 지역구 주민들의 눈치나 살피는 정치인들이 지하철 강도를 만난 약한 여인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 같은가?

“나요” 라고 소리친들 도망을 멈출 강도가 어디에 있고, 금뱃지에 주눅들 폭력 청소년들이 어디에 있는가?

 

이 시대 잃어 가는 부성(父性)을 내 안에서 찾자. 그리고 인기에 영합하고, 국민들 앞에 얼굴 내밀고 몇 마디 말을 하기보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한다 정치인들은.

 

오늘도 역사 속에 잠든 우리네 선조들의 양심은 맥맥히 역사의 끝자락을 붙들고 민초(民草)를 우려했던 이들이다. 그들을 등에 업고 입신양명의 치죄를 일삼던 당대의 권력가들이 아님이다.

 

가을이 선연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정치다운 정치와 함께 역사를 함께 걱정하는 국민들 속에 든든한 지주로 남을 큰 인물이 몹시 아쉽다.

겨울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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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분(線分)

 

2002. 1. 23

 

산수고 수학이고 별 흥미가 없기는 일반이다. 아마 체질상 이미 정의된 공리나 공식대로 쫓아가지 않고서는 답을 구할 수가 없는 과정의 속성이 안 맞는 것 같다. 그래선지 고등학교 시절엔 화려한 0점의 경험도 있다. 아마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그 쪽지 시험지가 ‘정석’이라는 참고서에 끼워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딴에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던지...

 

그럼에도 기억나는 정의 ‘선분(線分)이란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이다.’

부산과 서울을 직선으로 연결을 해 보았다. 부산이란 점과 서울이란 점을 잇는 가장 짧은거리가 생겼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선분 안에 들어오는 도시들을 대충 훑어보았더니 아래서부터 올라가면서 부산-양산-밀양-경산-대구-구미-상주-청주-음성-이천-하남-서울 선이 형성된다. 이들 도시를 관통하는 선이 직선으로 생긴다면 부산서 서울에 이르는 가장 빠른 도로가 된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른 아침부터 뜬금없이 수학에 도시타령을 하는 이유가 있다. 속이 상해서 지도에 금을 그어본 것이다. 그러나 내 속만 그렇게 타는 건지 그게 공감할 만한 공통적인 사유가 되는 지는 모르겠다.

 

울산 환경연합인가 하는 단체와 울산 환경지킴이 단체가 오늘부터 서울에서 집회를 갖겠다고 출발을 했다는 기사가 났다.

 내원사라는 사찰도 합세를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 동안 말 많고 탈 많던 고속전철의 선로가 천성산 습지를 관통하는 것으로 설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천성산은 영남 알프스라고 하는 풍광 좋은 산 어울림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산이다. 내원사라고 하는 고찰을 안고 있으면서, 좋은 계곡이 있어 등산객들이 아주 즐겨 찾는 산이다. 울산방면에서 길을 잡아 정상을 타고 부산방면으로 내려오다 보면 철쭉군락지가 있어 보호지역으로 설정될 정도로 예쁜 모습도 아울러 갖춘 산이다.

그런 산이 훼손된다니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반대를 해야 옳겠다.

 

그런데 내심 개운치가 않은 것은, 반대의 이면에 해결을 위한 대안은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즘 툭하면 반대집회다 뭐다, 아주 시민들의 힘이 막강해 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늘 피해를 보는 입장이 되는 게 또 시민들이기는 하다마는...

 

고속 전철로 부산서 서울에 이르는 시간이 2시간. 시속 250킬로미터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 속도라면 굽은 선을 따라 돌 수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역과 역 사이의 철로는 직선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거다.

해서 이어 본 선이 위의 도시를 관통하는 선이 나오게 된다. 계획에 의하면 경주를 우회해서 대구방면으로 철로가 난다고 하는데, 한동안 울산을 경유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 왔던 터이고, 아직 그 논쟁은 계속 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가 있다. 이미 기차는 수입이 되어서 조립이 된 상태이고 보면, 운행을 하지 않아서 생기게 되는 손실 부분이 엄청나다고 한다. 서둘러서 철로를 깔지 않으면 손실은 점점 커질 것이고, 기차는 선채로 노후화 될 것이다. 하니 급하다. 그런 와중에 민간단체에서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형국의 일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그간 취해 온 정책의 잘못을 따지자면 또 할 말은 많다. 그렇지만 이 사회가 발휘해야할 벡터(vector)가 너무 작용되지 않는 현상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다.

천성산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할 사람들이었다면, 오래 전 산불방지를 목적으로 산중턱이 뭉턱 잘려나가는 방화로를 닦을 때 목을 걸고 반대를 했어야 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혹여 다른 노림수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고속전철의 두 점을 잇는 선분 안에 천성산이 들어있다면, 국가경영이라는 커다란 정책 안에 환경보호 정책이라는 부분이 있을 터이다.

어찌 사랑하는 마음이 남 같지 않아서 그런 결정을 할 것인가?

고속철도니 천성산 습지니 하는 말들이 서글프게 들리는 건, 언제나 국민과 정부간에 가장 짧은 공감의 선분이 형성될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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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希望)과 소망(所望)

 

2002. 1. 15

 

아직 인생을 제대로 논 할 만큼의 그릇이 아님을 느끼고 있는 것은 선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이다. 세월의 흐름 정도가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도 유행을 타는 것인지 몰라도 벌써 50을 바라보는 마지막 고개를 등 떠밀려 올라왔지만, 여전한 치기(稚氣)를 벗지 못한 자아를 당연히 여기는 부족의 덩어리다.

 

하긴 불혹(不惑)의 40이 되던 해, 그 한해가 온통 회한(悔恨) 이었던 시절에 비해, 이젠 그도 자기합리화의 위안에 담아 넣은 초라한 초로의 길을 준비하는 시대의 보통 사람이 되었다고 자위를 해야 할지...

 

슬픈 일이지만 살면서 잊어 가는 사람도 있고, 다행스럽게 그 안에서 새로운 만남의 기회도 있는 것이 또 살이다. 잊어간다는 것이 슬픈 이유는 잊음 그 자체가 아니고 어쩌면 그 이면적인 배경의 사유를 안고 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새로운 만남이 예전의 그것과 같지 않은 건, 순수의 자아가 계산적인 자아에 묻혀 도시 그 본디의 모습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 까닭이다.

 

여전히 가슴 설렘으로 옛 만남과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는 글줄을 대한 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화두에 대한 자문에 대한 답변.

그 여자는 소망을 말했다. 그것은 돌아갈 곳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젊음의 희망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고.

 

희망의 덩어리는 아무래도 큰 것 같다. 그리고 덜 구체적인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도가 가능한 미도래(未到來)의 기다림이다.

소망은 그 보다는 작은 것 같다. 어쩌면 절망스러움 중에 찾아낸 보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希望)이 본디 어떤 뜻으로 이해되든, 아주 감정을 배제한 사전적 설명은 이렇다.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고 바람.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이 단어는 또 기망(冀望), 소망(所望), 희원(希願)과 닮은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희망과 소망은 닮은 말임에도 굳이 그 차이를 나는 기대하기에, 나름의 변(辯)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망을 찾아보았다.

‘바람, 바라는 바, 소원, 희망, 의망(意望)’

역시 희망과 닮은 말임을 사전은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느껴지는 부족.

다시 뒤적여 찾아낸 활용의 예를 보니, 어느 정도 구분 지어 설명할 정도의 단서가 잡힌다.

희망이 어울리는 문장 - 아직도 ~은 있다. ‘아직도’ 의 여운과 젊음, 그리고 그 추상성과 공간성. 소망이 어울리는 문장의 예는 그랬다. 여운보다는 절박함이, 젊음보다는 빛바램이, 그리고 추상성과 공간성보다는 회귀성과 평면성이 보인다.

‘남북통일을 ~하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간절한 ~을 이루다.’

 

분명 희망은 아직 없었던 것의 커다란 그림에 대한 동경이고 바람이다. 반면 소망은 이미 경험 중에 있었던 좋은 것에 대한 회귀의 기대이다.

그래서 희망보다 소망은 조금은 가슴 싸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돌아가 다시 있고픈 곳의 장소적 의미로 인해서 더욱.

希와 所의 영문비교는 그 의미를 더 분명히 하고 있다. hope와 place라는 전혀 다른 비교를 통해.

 

희망의 덩어리는 크다. 그래서 덜 구체적이다.

반면 소망은 경험의 조각이고, 회귀의 바람이자, 아주 작을지도 모를 한정적 공간이다.

두 마음정도가 겨우 합쳐 머무를 공간, 두 몸 정도가 겨우 비집고 들어설 수 있는 공간.

희망과 소망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잘 모르겠다.

‘비교해 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라는 것은 이성적일지는 몰라도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아직 모르겠다. 늦게라도 돌아갈 곳이 있음 그 자체가 소망의 가치로 넉넉한 것인지 아닌지...

그렇기는 하지만 있어서 없기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소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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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선구(先驅)

 

2000. 6. 28

 

“만일 최고 경영자가 변화를 선언하면 회사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직원들이 그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 들일까?”

“아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겠지.”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환경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어. 변화에 대한 일종의 방어벽이라 할 수 있지.

그런 와중에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고자 하는 발언권이 센 사람이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너도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게 되지.”

“어떤 이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선심을 쓰기 위해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일반 조직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

 

선문답 같은 말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게 될 즈음이면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숨 가쁜 변화가 일견 시대적인 당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갑갑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은 아마 남의 일이 아니어서 일겁니다.

 

‘변화’라고 하는 것은 기실 요즈음에 대두되는 화두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도 더 나음을 추구하는 한 ‘변화’는 필연적인 화두로 등장해 왔습니다. 일찍이 경제학자 슘페터는 삶의 기반자체를 흔드는 변화의 필요를 역설한 바 있고, 그 변화의 출발은 ‘현상의 파괴’라고 말했습니다. 강조하여 말하기를 ‘파괴 중에 가장 큰 파괴가 자기 파괴’라고 주장함으로써 변화와 혁신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부터 시작하여야 함을 은연중에 강조했습니다.

모두(冒頭)에 인용한 대화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변화의 환경에 대처하는 비교되는 두 사람을 내 세워서 ‘변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또 변화자체를 내 문제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아주 짤막한 내용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업무외적인 자리에서 많은 상식을 얻고 있고, 나와 다른 차원의 높은 식견을 접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단히 행복한 주변여건을 갖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도사도 만나고, 철학자고 만나고, 교수도 만나고, 개척자도 만나고, 선구자도 만나고, 심지어 선인(仙人)들도 만납니다.

 

얼마 전에도 7-8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동물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접했습니다.

그 날 얘기는 철새들의 이동에 관한 얘기였는데, 철새들은 기온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네요.

그래야 일정한 고도에 오르게 되면 원하는 지역의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행을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덧붙여 자기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날갯짓을 해야 한다고 하면 수만리 길을 제대로 날아가는 새는 한 마리도 없을 거라고요...

과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저 자신도 까치가 날아다니는 양을 보면서 느낀 것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갯짓이 그렇게 힘겹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류를 타게 되면 날개의 구실은 중심을 잡고 바람을 타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이동과정에서 죽게 되고, 날개가 다 상해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장거리를 비행 하는 중에 약한 개체는 자연 도태되고 강한 개체만 살아남아 그 속성이 유전되면서 종의 번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자연의 현상에서 기업의 생리나 속성을 연상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절한 삶의 원리는 사실 자연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고’, ‘초일류’ 등이 기업의 목표로 선정될 때까지는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거지요.

 

요즘 청중회원 중에 몇몇 분들이 상당한 고민 중에 있습니다. 자신의 업무외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일로 인식하고 회합에 참여하는 그 분들을 보면서 ‘현대중공업의 저력’을 보기도 합니다.

현대중공업의 역사는 결국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의 모습을 유지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청중회는 생리적으로 선각과 선구와는 떨어질 수 없는 출신의 배경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리 직급의 젊은 시절, ‘경영자적인 시각으로 회사의 문제를 건의하라.’는 사명의 일부를 위임받았고, ‘젊은 층의 활기찬 제언을 경영에 반영하여 새로운 경영감각을 접목 시키겠다’는 회사의 의지를 가까이서 접한 집단이었으며,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인재로 선발된 집단‘으로서의 자부심은 시절이 조금 지나 퇴색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청중회의 정신적인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각(先覺)은 고독합니다. 선구(先驅)는 힘겹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말 달리던 선구자’가 있어서 오늘을 살 수 있었습니다. 변화의 중심에 청중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변으로부터 변화를 부르짖는 통속적 변화제창자이기보다 자신의 변화를 통해 주변을 함께 변화시켜 나가는 ‘변화 실천자’인 동시에 ‘변화 지도자’로서의 청중회를 기대합니다. 훗날 현대중공업 역사 속에서 뭔가 뚜렷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청중회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더워서 몸 추스리기도 귀찮은 어느 여름의 한 날을 택해서 변화를 주제로 삼은 얇은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청중회원들의 여유 있는 모습도 기대합니다. (청중회보 2000년 6월호 맞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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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위기를 보면서

 

1997. 12. 15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전날 보다 추위는 덜했지만 제법 겨울다운 밤이었습니다.

근 열시가 가까운 시간, 우연히 동승하게 된 어떤 아저씨는 택시를 탄 후에도 밖에서 피워문 담배를 여전히 물고 있었습니다. 다른 동승자를 의식했음인지, 창문을 열려고 애쓰면서 미안한 듯 한 마디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술이 많이 취해서...”

조금을 가다가 우리보다 먼저 타고 있던 아주머니가 내리고 나서 이 아저씨는 한 마디 더 했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오늘 송년회를 간단히 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예전 같으면 얘깃거리도 아닙니다만 어려운 시기에 술 취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해결한 듯 이쪽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해왔습니다.

 “사실 우리 같은 서민이 조촐하게 술 한 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어디 우리가 만든 일입니까? 죄다 정치하는 놈들이 이렇게 만든 것 아닙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 마음 한 가운데도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선뜻 동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차기에 대권을 잡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자신의 무결(無缺)을 입증할 의도로 윤동주님의 서시를 인용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비평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들의 소리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서로에게 입증 받고자 할 것이 아니고 국민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이렇듯 제자신도 남의 말을 쉽게 하는 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국가부도사태로 일컬어지고 있는 지금의 실정에 대해 국민 된 나 자신은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하고 자문해 볼 때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있어도 많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책임의 크기로 보면야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 있는 책임의 종류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외화가 바닥이 났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기죽게 하면 안 된다고 외제 메이커의 가방과 티셔츠를 사주고 있던 가운데 우리의 외화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술 한 잔 하고 나면 호기롭게 양담배를 시키고 있던 그 시간에도 양담배를 수입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달러가 나가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목적으로 향기 좋은 외제 술을 사던 그 시간에도 백화점 카운터를 통해 지불한 내 돈은 외화로 바뀌어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시절 국어 책에 소개된 동요가 생각납니다.

입김으로 호오 호

유리창을 흐려 놓고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봄아 봄아 오너라

어서 오너라

봄이 오면 나는 나는

새로 4학년

내 마음엔 벌써

봄이 와 있다

 

당시만 해도 봄은 그닥 기다릴 만한 계절이 못되었었습니다.

이른바 춘궁기(春窮期)라 해서 먹을 만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봄은 와야 했습니다. 배고픔의 그 기간이 싫어서 봄을 거부해 버리면 다시 일년간의 긴긴 기간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봄이 와야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가을을 기다리며 밭도 갈고, 씨도 뿌리고, 김도 매야지요. 그 결과가 다시 풍족치 않은 결과로 이어질지라도 아마 그래서 또 봄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는 봄은 희망의 봄입니다.

 

종자 손도 좀 보고, 밭의 거름 상태도 살펴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이 괴로움만은 아닙니다.

“작년에 가뭄이 심했으니 올해도 여전히 논밭이 말라붙을 것이 아닌가. 열심히 한들 부질없는 일이다.”고 자연의 기후를 탓할 사람도 있겠지요. 마지못해 하는 그 사람도 또 다른 봄은 맞을 겁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내리려고 하면서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차비가 얼마요?”

“천 백 원입니다.”

“천 백 원이라고? 이 차 번호 외웠다가 다시 타야겠네.”

아마 평소에는 같은 거리를 좀 더 비싸게 타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차원이 아니라 정당한 몫만 주장해도 작은 감사를 느끼는 사회입니다.

 

케네디의 연설 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오늘 미국의 국민들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십시오.”

 

잘 못 된 것을 용서하지는 말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탓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또한 제 생각입니다.

 

없었으면 좋겠지만 기왕에 닥친 고통이라면 좋은 날을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 보자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한 때가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누구 못지않게 저는 제 가족을 사랑하고 제 회사를 사랑하고, 제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가끔 짜증도 내고 신경질도 부립니다만, 그래도 내칠 수 없는 내 가족, 내 회사, 내 나라입니다.

여전히 좋은 봄은 제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겨울은 견딜 만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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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LE 이야기

 

1996. 7. 26

 

 RULE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상당히 복잡하게 정의가 되어있다. 그 중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있는 것이다 싶은 정의가 또 굉장히 길게 되어 있다. WEBSTER에 의하면

An authoritative direction for conduct, ESP. one of the regulations governing procedure in a legislative body or a regulation observed by the players in a game, sport, or compe-tition. 이라고 되어있다. 모자라는 해석이지만 game이나 sport에서 선수를 규율하는 규칙을 의미한다는 뜻이 되겠다.

 

 올림픽 열기가 뜨겁다. 대한민국은 당초 종합 7위를 목표로 했다가 쿠바와 스페인의 전력이 예년 같지 않음에 따라 종합 5위로 목표를 수정했다 하는데 많은 장면 ‘대한국민 만세’가 금과 함께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남과 겨루기 대목에서 RULE을 적용하는 것은 형평 즉 조건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승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접어준다’는 말을 사용한다. 기량의 차이가 현격한 상대와 불가불 겨루기를 해야 할 장면이 되면 상수(上手)가 하수(下手)에게 일정 수준의 형평 유지를 위한 불리 조건을 감수하게 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내기 골프의 핸디가 그것이고 바둑의 접기가 그렇고, 남녀 성 대결 테니스의 페널티 조항이 그것이며, 팔씨름의 팔목잡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접기가 없는 처절한 겨룸터가 고스톱의 경우인데 여기서도 또한 대단히 복잡한 RULE이 적용되며, 선수(?)들은 어떠한 형태의 게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RULE이 상당히 큰 폭으로 바뀐다.

이른바 게임의 형태란 전두환 고돌이, 노태우 고돌이, 김영삼 고돌이, 이주일 고돌이 등이 있고, 계보에 잘 끼지는 않지만 최 면장 고돌이도 있다고 한다. 이 게임의 RULE은 상당히 시사(時事)에 민감해서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었던 작년 한 해 동안은 ‘삼풍 고돌이’가 전국 고돌이 계를 강타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이들 고돌이 판에는 실력의 고하를 철저히 무시한다. 기본은 3점, 실력이 안 되면 돈으로 때우면 된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돈으로 때우는 것을 낙 삼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시종 열 받아 판 끝나면 제 신발을 못 찾아 신는 사람도 간혹 있는 모양이다.

 

 이 게임이 지니는 장점은 좁은 공간에서도 가능하고, 소도구가 간단하고 말 몇 마디에 Rule Meeting이 끝나기 때문에 하시라도 어느 장소에서든 판 벌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까지 한판 벌리고 있는 점잖은 분들이 간혹 신문에 보도될 정도니까...

진짜로 서글픈 장면은 그 다음이다. 한판 어울리다 보면 아무래도 경험이 많고 판세를 잘 읽는 사람이 끝내 소득에 연결시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운이 7이요, 기술이 3’ 이라는 고스톱 논리도 노련미가 가세한 ‘운7 기3’에는 밀리기 마련인가 보다.

 마치 남의 패를 읽고 나 있듯이 “어이 똥 내 똥”하고 말해 버리면 오광 알짜 들고 앉아서도 광박 쓰는 예가 왕왕 있게 된다. RULE 더러워서 ‘독박’도 면해야겠고, ‘피박’도 면해야겠고, 눈물겹지만 똥광 삼광 포기하고 막판에 똥쌍피까지 버리고 난 허탈감이야 잃은 돈의 아까움에 비길까?

 

최근 우리나라 경제실태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고스톱 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이란 나라-일찌감치 광 팔아 놓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남의 패 들여다보면서 느물느물 웃고 앉았고, 얼마 전 잃었던 돈 ‘이제는 만회해야지’하는 미국은 흔들고 백리를 뛰었는데 알광 들고 앉아있는 일본은 미국이 얼른 피 붙여먹고 ‘고’ 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속 모르는 분단민족 북한에서는 얇아져 가는 주머니 사정도 모르고 자꾸만 개평 달라고 떼를 쓰고 앉았으니, 작전도 없이 뒤 패 붙기만 기다리는 속이 갑갑하기만 하다. 정말로 속없는 사람들, 여의도에 모여서 ‘감 놔라, 배 놔라’ 참견만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 조차 만만치가 않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우리 회사가 처한 양이 꼭 우리나라가 처한 고스톱 판의 그 모양을 닮았다. ‘고 임금, 저 생산성으로 가격 경쟁력 약화’, ‘주력 조선 산업의 부진’, ‘경쟁사 대비 인당 생산성 저하’,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 부족’... 그 와중에 마지막까지 들고 앉아 때를 기다려야 할 패를 자꾸만 내 놓으라고 하니 한 치 양보 없이 죄어오는 RULE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야박하기만 하다. ‘차라리 광이나 팔고 말걸 그랬나?’ 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해도 ‘이연사(二連死) 금지법’에 울며 겨자 먹기로 패를 들고 앉아 있기는 하다만, 시의 적절한 훈수로 돈을 따게는 못하더라도 피박만이라도 면하도록 응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이번 판 홀딱 벗고, 다음 판을 기다리란다’

RULE만 아니면, 체면만 아니면, 화투판 걷어버리고 소리라도 한번 지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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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비장애인

 

1996. 11. 21

 

TV프로그램 개편 철이 되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러면서도 앞 다투어 문제성이 있는 드라마로 시청률 경쟁을 벌이거나, 엎어지고, 자빠지고, 깨지고 하는 과장된 코미디 프로가 시청자들을 우롱한다.

문외한의 입장에서 얄팍한 감정만을 가지고 전문가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편승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방송사마다 하도 많은 코미디프로가 있다보니까 제목을 외우기도 여의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 ‘웃으면 복이 와요’ 뭐 이런 대표 타이틀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고, 이경규가 진행하는 코너가 있었다. 내용은 일종의 몰래카메라 형태로 어떤 기대되는 행동이 발생되는 현장을 지켜보다가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푸짐한 상품을 전달하는 그런 프로였다.

 

11월 첫 주던가 - ‘늦은 밤에 사람의 통행이 없는 상황에서 교통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주제로 횡단보도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밤 10시 이후 지켜본 그 현장에서 좀처럼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새벽으로 갈 즈음 진행자는 추위에 떨고, 뭉개지는 준법질서의 현장만 계속 방송되고 있었다. 새벽 4시 무렵 흰색 승용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주춤주춤 하더니 이내 멎었다. 아마 일시 정지는 선발기준에서 무시되는 것으로 약속이 되어있던 모양인지 진행자는 “하나, 둘, 셋...” 하더니 열까지 카운트를 하고 나서는 “드디어 찾았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도로로 뛰어 나갔다. 차창을 내리고 인터뷰를 진행하려던 진행자의 표정엔 순간 놀라움이 번졌다.

그도 그럴밖에...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말하기조차 힘들게 표정이 일그러진 뇌성마비 환자였다.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그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가 더욱 더 그 사람의 틀어진 사지를 안타깝게 했다. TV에서는 그의 말을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자막을 통해 대화를 보여주었다.

 

진행자 : 늘 교통신호를 지키십니까?

운전자 : 예, 늘 지켜요.

진행자 : 사람이 없는 이런 시간에도 말입니까?

운전자 : 예, 늘 지켜요.

진행자 :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운전자 : 제 와이픕니다.

 

부끄러운 비장애인들이다. 붐비는 고속도로에서는 여전히 비상등을 켜고 갓길을 달리는 승용차들이 많고, 버스 전용차선을 버젓이 달리는 뻔뻔한 비장애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성(知性)과 양심(良心)이 지배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이다. 그러나 지성과 양심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보편타당의 당위(當爲)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공허한 소리일 때 그러하다.

가치라는 말은 ‘인간정신의 목표가 되는 보편타당의 당위’란 말로 풀이되고 있는데, 그 대상은 眞, 善, 美 따위로 하고 있다. 진실함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포장되어 나타나서는 그 가치가 없다.

 

역설적으로 僞善의 도가 철저하면 할수록 그것이 점점 고매한 인격에 수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진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위가 실천되기 어려운 세상이 되면 될수록, 편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될수록, 부끄러운 비장애인들이 그 부끄러움조차 모르면서 당위를 행함이 마치 보석처럼 찾아진 선행으로 치부될 수가 있다.

 

‘부끄러운 비장애인’은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내 사는 세상의 묘한 話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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