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있는 직장 후배가 조용필의 HELLO CD를 한장 선물해서 출퇴근시간 차에서 오가며 들어보았는데..

처음에는 별 감흥이나 묘미가 없더라구요..  조용필도 전성기를 넘어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근데 한 2주 반복해서 들으니 헬로를 포함한 10곡 전곡이 다 귀에 술술 들어오고 점점 빠져드는 깊이가

아마 유속  빠른 동네에서는 노래방에 벌써 신청 조회수가 막 올라가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요즘 노래방은 잘 안가서 (못가서) 모르겠지만..

역시 조용필 !! 그 내공을 확인케 합니다. CD든 음원 다운이든 강추입니다.

 

나루 형님의 글을 대하면 여전히 그 깊은 내공이 느껴지며 조용필의 음악이 연상이 됩니다.

90년대 사원들의 공유 채널이라고는 현중오피스 공지기능 밖에 없을 때 압도적으로 많은 글 올리기로 한때 사내 문화를 선도하고 언론을 장악(?)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그 뒤 저도 잠간이나마 흉내를 낸 적이 있지만요..

 

퇴직자 교육 예습 미리 잘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임원이란 집단에게는 그러한 기회라도 있는 지 모르겠습니만, (어차피 임시직원이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컨셉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 3단계로 접어드는 우리세대엔 모두 필요한 교육이요 개념 정리이며 각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000원도 아껴 쓰라 ! 많은 반성을 하게 합니다.

 

이달 말 며칠간 미국, 일본 연결 출장이 있습니다. 여건되면 면세 양주나 한병 사서 생육 모임이 헌사하겠습니다.

점점 더위지는 날씨에 다들 몸 건강히 지나시길 비옵니다.

 

용인 마북골에서 와은 드림

(현대중공업 청중회 생육신 지회 탈퇴자 모임 대표 드림)

 

Ps. 태정께는 전화 한번 드릴게요..

<Subject: 맞는 말씀입니다.>

어젠 은퇴설계 연장과정으로 진행되는 가족특강에 참석을 했습니다.

부부 동반 참석이라서 아내에게 우리 인재교육원의 좋은 시설을 견학시킬 기회도 제공할 겸 함께 참석을 했지요.

강의가 진행되면서 아내의 표정을 살펴보니 꽤 공감하는 듯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전 강의 내용에 대해 썩 만족스럽지가 못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이 그 분야에서 밥을 먹어봤던 경험이 있고, 대부분의 전형적인 강의 패턴을 알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너무 뻔한 도입 – 아이스 브레이킹은 참 식상합니다. 아직 자리가 서먹서먹한데 부부가 마주 보면서 하이파이브도 하고 애교 있는 표정을 지으라는 주문 같은 것이 그 옙니다.

둘째는 주제 접근의 문제입니다. 갈등의 본류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가장들은 왜 흔들리나? 그들이 지금까지 누린 사회적 신분과(특히 대기업 고위 관리자의 경우 명함 자체가 사회적 신분의 등급이 됩니다.) 은퇴 후 겪게 되는 존재감의 상실에서 오는 극한 절망감,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월수입원의 단절 또는 엄청난 감소에 따른 사회생활 패턴의 극한(갑자기 닥쳐오는 – 시간의 문제)변화에 대한 부적응, 아직 모든 것이 얼떨떨하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이리 저리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노골적인 불만의 시선, 엄마를 따라 함께 보내오는 자녀들의 눈총, 서서히 정리를 할 수밖에 없는 지금까지는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주변관계…,

이들 문제로 인한 당사자의 고충내지는 심리적 위축을 잘 다독여 줄 필요가 있고, 그 절대적인 역할의 주체가 가족(특히 아내)라는 쪽으로 정리가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퇴직 이후 가장 중요한 생활의 중심은 부부가 태극문양의 상하를 차지하고 있다고 풀어나가기는 했습니다만, 본질을 파고 들어 해법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우선은 관계정리를 통한 새로운 사회생활의 공식을 바꾸고,

1. 다 끊어라.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

2. 자식에 대한 투자는 절대 하지 말아라. 나중에 자식들도 안다.

3. 철저하게 줄여라. 눈 높이를 낮추면 살 수 있다.

   - 남자 강사 분은 은퇴 후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돈 내고 1,000원짜리 빵 하나 사 먹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 대단히 교훈적이었습니다.

4. 부부가 상의하라. 남편들 비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웃기는 소리다.

   - 무지 무지한 공감에 무지 무지한 박수를 마음속으로 보냈습니다.

5. 더 심한 것 하나는 남편들은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면서 아내를 향한 배려를 키우라는 이상한 공식입니다.

- 적어도 하루 밥 한끼 정도는 남편 스스로 지어서 해결을 하도록 하고,

- 부인의 외출에 대해 심하게 참견을 하지 않도록 하며,

- 설령 알아도 그저 넘어가 주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 더 큰 모순은 아내를(아내만을?) 위한 집안의 공간을 차지하지 말랍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책도 보고 신문도 보고 

    그러라고…

 

그 다음 평소 생활을 통해 부부관계를 잘 정립할 필요가 있는데,

1. 잘했어요.

2. 마워요.

3. 안해요.

4. 랑해요. 를 생활화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결론입니다.

 

감동이 물 밀 듯 밀려오시는지요?

좋은 기사가 있어서 전달하려다가 어제 저녁 교육현장의 생생한 기억이 아직 있어서 서두에 넋두리를 보탰습니다.

 

인용 글은 교육방법에 대한 것인데, 진짜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주젭니다.

소생이 수학을 사실 포기한 것은 ‘수열’에서부터 포기했습니다. ‘지수와 로그’까지는 잘 따라갔어요. 그런데 대부분 수학 수업의 패턴이 공식을 외우고 예제를 풀어서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와는 거리가 멀었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과학(물리)의 경우 ‘운동과 에너지’에서 거의 포기 모드로 들어갑니다. 벌써 중력이 나오고 가속도가 나오고 하는데, 이 또한 원리에 대한 이해보다는 공식에 중심을 둔 문제 풀이 중심의 수업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때 부지런히 따라갔어야 하는데 뭔 배짱으로 이 중요한 과목을 포기했었나 싶습니다.

 

괜한 넋두리 글을 올려서 안해요. 긴 글 읽어주셔서 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들이시기 대단하십니다. 이해가…

약간 흐린 여름 날 아침인데, 덥지 않아서 좋습니다. 랑해요. … 그거 참.

 

<인용>

문제 풀이 법만 익히면 효과는 반짝..

스스로 분석해야 응용 문제도 뚝딱

 

아이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머리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면 머리가 더 나빠지는 걸까요?

감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감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문제의 패턴에 맞는 풀이법을 익히고, 유사한 문제가 나오는 경우
그 풀이법을 떠올려서 푸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수학 관련 책들이 대부분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유형의 문제를 쭉 늘어놓고 반복하면서 익히게 합니다.

사실 이렇게 감으로 하는 학습은 동양권의 우뇌 성향이 강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부 방법입니다. 이러한 학습은 단기적인 
 성과를 낼 때 최고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반복하면 나름대로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또 문제를 보는 순간에 바로 답을 할 수 있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우리나라 시험제도에서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장기적으로는 뇌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패턴이 뇌에
각인되어 패턴을 벗어나게 되면 문제를 응용해서 풀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손도 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나아가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서 문제를 이해하는 과정을 막음으로써 사고력 및 창의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설령 수학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온다 하더라도 언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수능에서 수학 점수가 1-2등급이 나오는 순간 언어는 바로 3-4등급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닌다면 아이에게 문제의 패턴을 알려줘서 지금 당장 성적을 올리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읽고
그 문제를 분석해서 나름대로 답을 구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 방법이 느리고, 또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지름길이라는 것을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출전]조선일보 <인용 끝>

그런 일이 있었네요.

 

우리가 불타는 갑판의 처절한 결심을 어려운 시절의 화두로 삼았던  시절이 하마 90년대 중 후반이 아니었겠나 싶네요.

되돌아 보면 이미 상당한 기간이 흘렀다는 얘기가 되고…

 

당시 불타는 갑판은 CA TV를 통해 방영도 됐었지요.

그때만해도 변화와 혁신의 당위는 2000년이라는 세월의 마디가 주는 의미로 인해 아직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큰 선물 보따리를 어깨 짐으로 메고 올 먼데서 오실 흰 옷 입은 손님 같은 존재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와은이 못내 아쉬워하는 헤어짐의 주인공 구본형 선생은 그 당시 그 화두를 실천적 언어로 제시했던 혁신계의 선각자셨지요.

관련 업무에 종사를 하면서도 정작 그 분의 좋은 글을 직접 보면서 느낌을 같이 하지는 못했었지만 가끔 전해 주는 메시지를 통해 막연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던 그런 분이셨네요.

 

미처 읽지 못했다는 ‘온천장에서 보내 온 글’에 의하면 이미 건강 상태가 상당히 안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부음을 전하는 이가 선택한 단어 ‘召天’ 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가셨음을 의미 함이니 아마 지난 토요일 1주기를 맞은 양교수님 같이 뛰어나신 분이시겠지요.

 

우린 그 때마다 아쉬움으로 현상을 보고, 느낌을 갖습니다.

그 느낌의 덩어리는 아쉬움, 또는 서러움, 안타까움 등 으로 표현됩니다만, 정작 우릴 슬프게 하는 것은 ‘단절의 아픔’ 입니다.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이지요.

 

스승님!

꽃과 바람을 좋아하시더니

바람 불고 꽃피는 봄에 홀연히 가시는 군요.

 

아마 제자이신 모양인데, 그 분은 그래서

 

별이 되는 꿈을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말로 고인을 보내 드리고 있네요.

 

와은의 마음같이 큰 슬픔이나 허전함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은 스쳐 지나가듯 아직은 관계랄 것도 없는

기회조차 없었던 분이셨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

 

그분의 글 줄을 통해 아주 작으나마 한 때 느낌을 공유했던 인연을 귀히 여기면서 말입니다.

 

 

김유인.

 별이 되는

 

이 글을 진심으로 전할 만한 분들이 몇 분 밖에 생각나질 않네요.

모든 것은 유한하고 그 유한함의 끝은 항상 오나 봅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는 저의 롤 모델이기도 했던 분의 1주기 추모회에 다녀왔습니다.

장례때 어느 노 교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양교수는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하느님이 그 능력을 쓰려고 먼저 데리고 가셨어..

 

구본형 선생도 그러한 가요..?

아니면 그가 언급했던 불타는 시추선에서 바다에 떨어지는,

그리하여 유일한 생존자가 된 어느 사람의 용기를 실천한 것인가요..?

한번 얼굴을 보고 소줏잔을 건넨 것 만으로 행운과 영광으로 삼아야 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수목

 

 

별이 되는 꿈

 

“어려운 때는 사는 것 만으로도 훌륭한 투쟁이 됩니다.

어둠이 자신을 빛내게 하세요.

- 구본형, 변화경영 시인 -

 

구본형 스승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계신 분도 있을 것이고, 편지를 받고 알게 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2013 413() 오후 7 50분경 별세하셨고,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일요일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스승님의 투병을 응원하기 위해 연구원들이 만들었던 즐거운 사진과 유쾌한 영상이 조문객실에서 상영되는 가운데, 빈소에서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많은 분들의 눈물이 서로에게 스며들었습니다.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에 장례일정과 선생님을 추모하는 게시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책에서 읽었던 좋은 글들, 함께 하셨던 일화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평안과 안식을 기원하는 덧글을 남겨 주시면 ‘추모행사’ 시에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글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스승님께서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 어딘가에 올린 글 중 일부를, 노트에 옮겨 적었던 내용입니다. 고민 게시판에 누군가 올렸던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내용’에 대한 답글로 기억합니다.

 

 

언젠가 별이 되는 꿈을 가지세요.

언젠가 이 어둠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는 자신을 그리도록 하세요.

 

가난이 만드는 대로 가지 말고,

가난을 통해 배우세요.

비전이 없는 곳에서 자신의 빛을 찾으세요.

 

자신이라는 퍼즐을 푸세요.

자신의 강점을 찾아내고 그것에 집중하세요.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라는 것을 명심하고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세요.

 

그건 시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권유 같기도 하고, 커다란 함성 같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말이 좋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려운 때는 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투쟁이 됩니다.

어둠이 자신을 빛내게 하세요..

 

2010년 연구원이 되기 위한 3차면접 여행에서

‘연구원이 되면 동기들을 위해 어떤 공헌을 하겠느냐?’ 고 물으셨을 때,

저는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겠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대답이 너무 상투적이군요.)

 

어쨌든 노래는 열심히 했습니다. 미사 중에 기도도 조금했고, 사랑도 조금 흉내냈지만, 수업 때마다 기타를 가지고 가서, 노래는 하루종일 주구장창 불러댔습니다. 사부님이 제게 보내신 마지막 문자도, ‘강연회 때 와서 노래 해 달라’ 는 내용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에 노래를 불러달라 하시니, 또 준비하겠습니다.  

 

스승님!

꽃과 바람을 좋아하시더니

바람 불고 꽃피는 봄에 홀연히 가시는 군요.

 

편안히 가십시오.

별이 되는 꿈을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

 

나는 내 마지막 날을 매우 유쾌하게 상상한다.

나는 그날이 축제이기를 바란다. 가장 유쾌하고 가장 시적이고 가장 많은 음악이 흐르고 내일을 위한 아무 걱정도 없는 축제를 떠올린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단명한 것들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그럴 것이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피워내는 몰입, 그리고 이내 사라지는 안타까움,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를 빛나게 한다.

 

언젠가 나는 내 명함에 '변화경영의 시인' 이라고 적어두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 이름은 내 묘비명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이 무수한 공명과 울림을 가진 한 편의 시이기를 바란다.

 

- 구본형 -

E=mc2 : 제곱의 법칙

 

(6) 늦은 임신과 이른 죽음

 

샤틀레는 연구 발표후 가족의 재정도 돌보고 다음 번 연구 주제를 고민하기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녀는 볼테르와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베르사유에 있는 새 세대의 조신들이 그녀가 유럽 근대 물리학의 뛰어난 해석자 중 한 사람이며, 또 여가 시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버질*의 작품을 번역하여 출간한 장본인임을 모르는 것에 대해 재미있어 했다. 그녀가 가끔씩 도박판에서 한바탕 확률을 계산해 내면,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시레이로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즐거운 이 은신처 안에’ 라임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볼테르에게 채소밭을 꾸며도 된다고 허락하고 한 친구에게 급히 편지를 썼다.

 

“나 임신했어. 너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내가 내 건강을 두려워하는지, 내 생명까지도. 나이 마흔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1749 4 3

시레이의 별장에서

 

임신은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혼 직후에도 아이를 가졌었다. 그때는 20세나 어린 나이였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당시에는 나이 들어 임신할 경우 살아남을 확률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시대의 의사들은 손이나 도구들을 씻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감염을 치료하는 항생제도 없었다. 오늘날처럼 자궁 출혈을 조절하는 약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대의 무능력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저 볼테르에게 자신이 아직 준비되기 전에 떠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녀 앞에 남아있는 시간은 확실했다. 출산 예정일은 9월이었다. 그녀는 매일 오랜 시간 동안 연구에 몰두했다. 남은 시간 안에 연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으므로 책상에 놓인 초들은 종종 새벽녘까지 타오르곤 했다.

1749 9 1일 샤틀레는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서류 꾸러미를 보냈다. 그 동안 자신이 뉴턴에 대해 연구해 온 주요 해석들의 완성본을 동봉한다는 글과 함께. 3일 후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무사히 출산을 했지만 감염으로 일주일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볼테르는 슬픔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반을 잃었다. 나는 그녀의 영혼을 위해 존재해 왔다.

 

그 무렵 mv2에 비례하는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물리학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다. 사랑했던 여인의 유산을 세상에 전하는 볼테르의 논증 능력은 그녀의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지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로 다음 세기에 페러데이**와 과학자들은 그녀의 이론을 채택했다. 형태의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양적 개념의 mv2을 모든 에너지의 보존 가능성 개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채택했다.

샤틀레의 분석과 연구 논문은 과학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진전이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업적은 잊혀졌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대단한 연구진을 감독해 내고 그 후 계속해서 사상 체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하기가 그다지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발랄했던 한 여인의 이른 죽음과 그녀가 본능적으로 보여주었던 과학에의 정열 앞에 숙연할 따름입니다. SMLee

 

버질*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라틴어: Publius Vergilius Maro 푸블리우스 웨르길리우스 마로, 영어: Vergil 버질, 기원전 70 10월 15 - 기원전 19 9월 21)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시인으로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그를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이탈리아 중류의 만투아(Mantua, 현재 만토바 Mantova) 근교의 안데스(Andes)에서 태어나다 (출생시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갈리아 알프스 이쪽 지역, 이탈리아 북부)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Magia Polla)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라틴어virga (어린나무)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라는 명칭이 (현재 영어프랑스어의 표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재 밀라노)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집으로 <시선> <농경가> 등이 있다

페러데이**

마이클 패러데이 (영어: Michael Faraday, 1791 9월 22 ~ 1867 8월 25)전자기학전기화학 분야에 큰 기여를 한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이다.

패러데이는 직류 전류가 흐르는 도체자기장에 대해 연구하여 이에 대한 기초를 세웠다. 그는 전자기유도, 반자성 현상, 그리고 전기 분해를 발견했다. 또한, 자성광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과,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립했다. 그가 발명한 전자기 회전 장치는 전기 모터의 근본적 형태가 되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전기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자로서, 패러데이는 벤젠을 발견했고, 염소(Cl)의 격자무늬 수산화물에 대해 조사했으며 초기 형태의 벤젠 버너, 산화 상태들의 체계, 그리고 양극, 음극, 전극, 이온과 같이 널리 쓰이는 전문 용어들을 발명했다.패러데이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과학연구소의 화학 Fullerian Professor이 되었고, 그의 인생 동안 그 위치에 머물렀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제본사의 수습공으로 일하게 된다. 패러데이는 당시 부유층들만 가질 수 있던 책을 주인이 찾아가기 전에 읽기 시작하며 꿈을 품게된다.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20살이 되던 어느 날 그에게 과학자 조수를 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했지만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험을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 이유를 찾아나갔다. 그러던 끝에 자기력을 전기로 바꿀 수 있는 전자기유도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패러데이는 비록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적분학과 같은 고등수학은 일부밖에 알지 못했지만, 그는 역사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자중 하나다. 몇몇의 과학사학자들은 그를 과학역사상 최고의 실험과학자로 불렀다. 전기용량SI 단위계 단위인 ‘패럿’은 패러데이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인데, 1 전자가 가진 전하량을 뜻한다. ( 96,485 C.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서 1F = 96500C 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패러데이의 유도 법칙기전력과 시간당 자기선속의 변화량은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러데이는 인격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로도 손꼽힌다. 그는 실험을 통해 수많은 발견을 해냈지만 이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특허권과, 크림전쟁을 위한 무기 개발도 거부했다. 그의 업적을 인정한 영국 왕립 연구소는 회장직과 함께 호화 저택, 기사 작위를 준다고 했으나, 이도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영국 정부가 그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뉴턴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자격이 있다'며 당시 귀족들만 묻힐 수 있었던 묘지를 지정해주었으나, 그는 작은 공동묘지에 묻히길 원한다며 이 마저도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우지 못해 꿈도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과학강연을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청원을 했다. 결국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1실링에 불과한 돈만 받고 강연을 하며 많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아인슈타인도 그를 존경하며 실험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저서《촛불 속의 과학이야기》

– 출전 : 위키백과 –

 

E=mc2 : 제곱의 법칙

 

(5) 결정적인 증거

 

에너지의 측정을 mv2로 하게 되면 문제점이 해결될 수 있었다. 정서로 가고 있는 트럭의 mv2 100 단위의 에너지라 치고, 충돌의 선로를 따라 정서로 가고 있는 두 번째의 트럭의 mv2 100 단위의 에너지라 하자. 뉴턴이 보기에는 서로 부딪혀서 상쇄되었지만,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그 것들은 더해졌다. 예를 들면 내가 100 단위의 에너지로 돌진해 나가고, 당신도 100 단위의 에너지로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고 하자. 우리가 서로 부딪힐 때, 우리가 가진 200 단위의 에너지는 금속조각들을 퉁겨나가게 하고, 마차바퀴를 뜨겁데 달구며, 계속 어지러운 소음을 울리면서 그 존재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스스로 움직인다. 세상에는 신이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에너지를 몰아내는 어떤 구멍이나 수문 같은 것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 태초에는 신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샤틀레는 이 같은 해석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이러한 견해를 주장한 이후 왜 수십 년 동안 그의 견해가 시들해졌는지도 알아챘다. 그의 주장은 너무 모호했다.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이 증거는 불충분했던 것이다. 볼테르가 그의 소설 캉디드*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던 것처럼, (라이프니츠)의 견해는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상할 정도로 수동적인 관점이었다.

샤틀레는 대화할 때 말이 엄청나게 빠르기로 유명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베르사유의 얼간이들과 시레이에서 볼테르와의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 이론에 관해서라면 휠씬 여유롭고 조리있게 말했다. 샤틀레는 라이프니츠의 첫 번째 논쟁과 그에 대한 기본적 비판들을 검토했다. 그리고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 그녀의 연구를 돕는 많은 전문가들과 함께 구체적인 증거들을 다방면으로 찾기 시작했다. 볼테르의 눈에 그녀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틀레에게 그 시기는 인생의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으며, 자신이 시레이에 설치한 연구 기구가 마침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와 동료들은 빌렘 스흐라베잔테의 최근 실험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였다.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스흐라베잔데**는 부드러운 진흙 판에 무게 추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만약 mv1이 맞는다면, 처음에 비해 2배 빠르게 떨어지는 무게 추는 2배 깊이 박힐 것이다. 3배 빠르게 떨어진다면 3배 깊이 박힐 것이다. 하지만 스흐라베잔데가 발견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놋쇠 공을 전보다 2배 빨리 내려치면, 진흙 속에 4배 깊이 박혔다. 3배 빠르게 내려치면 진흙 속에 9배 깊이 박혔다. 그것은 E=mv2의 원리로 생각하면 예상할 수 있는 수치였다. 2의 제곱은 4이다. 3의 제곱은 9이다. 그 공식은 생소한 방식이긴 했지만, 자연에 대한 근본원리인 듯 보였다.

스흐라베잔데는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종합적으로 설명해 내는 이론적인 능력은 부족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최고의 이론가였지만 자세한 실험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사실 라이프니츠가 mv2를 내 놓은 것은 상당 부분 추측에 의한 것이었다. 샤틀레의 연구는 이 틈새를 메웠다. 그녀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발전시켰고, 네덜란드 과학자의 실험 결과를 그 안에 적용시켰다. 그래서 마침내 mv2을 효과적인 에너지의 정의로 보는 강력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녀의 발표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글은 늘 분명하고 명쾌했다. 이렇게 해서 시레이는 몇 안 되는 진정한 독립 연구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어권 과학자들은 자동적으로 뉴턴의 편을 들었고, 독일어권 과학자들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는 항상 중도적 입장에서 결정표를 던지곤 했다. 샤틀레의 목소리는 마침내 이 논쟁을 마감하는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위와 같이 속도의 제곱으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정의하는 방식은 앞서의 뉴턴 역학을 발전시켜 라그랑주 역학을 탄생케 합니다. , 영국의 뉴턴은 힘의 역학을 개창하였고 프랑스의 라그랑주는 샤틀레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에너지의 역학을 완성한 셈이죠. 아래 왼쪽은 잘 아는 뉴턴 역학 제2법칙, 오른쪽은 라그랑주 운동 방정식. 의미하는 내용은 서로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려우니 눈구경만 하고 가십시다.

                               

 

학창 시절 계몽주의->볼테르->캉디드로 연결해서 암기하던 캉디드의 내용을 이제야 봅니다. 같은 풍자소설이라도 돈키호테처럼 유명했으면 줄거리라도 주워 들었을 텐데 한국 인문학 교육, 좀더 정확하고 솔직하게는 인문고등학교 교육 문제 많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인 스흐라베잔데 (Willem s Gravesande)는 이름 찾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한때 드디어 위키피디아에 나오지 않는 인물을 찾았다고 기뻐하였지만) 끝내 찾았기에 이미지로 잘라서 첨부합니다. 위키피디아, 정말 대단합니다. 그림이 뜨지 않으신 분 들께는 죄송.  

그나저나 과학에 신은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인가 ? 아니면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가 ? 대책 없는 물음, 감당할 수 없는 의문 ? 꼬리를 내리는 것이 현명하겠지요 ? SMLee

 

*캉디드 [Candide]

1759년 발간. 부제목 낙천주의(樂天主義)’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라이프니츠 등의 낙천적 세계관을 조소하고 사회적 부정 ·불합리를 고발하는 철학적 콩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캉디드는 숙부인 남작의 저택에서 팡그로스 박사의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 즉, 현재의 상태는 가장 옳다는 주장을 믿는 순진한(프랑스어로 ‘캉디드’) 청년이다. 사촌 큐네공드를 연모했다가 숙부에게 쫓겨난 그는 가는 곳마다 전쟁 ·병고 ·조난 ·지진 ·종교재판 ·고문 ·폭행 등을 겪는다. 방랑 중 팡그로스 박사를 만나 숙부의 집이 병화(兵火)에 소실되었음을 알게 된다. 포르투갈에서 큐네공드를 만나 두 사람은 남아메리카로 향했으나, 여기서도 재난을 만나 헤어지게 된다. 캉디드는 도원경(桃源境:엘도라도)에 당도하나, 큐네공드를 잊을 수 없어 그녀를 찾아 대륙으로 돌아간다. 고난을 겪어 추악하고 성미가 까다로워진 큐네공드와 여전히 낙천주의를 고집하는 팡그로스와 재회하여 자그마한 농장을 꾸려나간다. 그의 비참한 체험과 온갖 사회적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무위(無爲)나 염세사상에 빠지지 않고 인간사회의 개선에 의욕을 잃지 않는 정신을 “그러나 내 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명한 맺음말로써 잘 나타내었다. 웃음을 통해서 지성에 호소하는, 명쾌하고 신랄하여 템포가 빠른 문체가 매력인 볼테르풍의 전형적인 풍자소설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제공)

E=mc2 : 제곱의 법칙

 

(4) 에너지란 무엇인가 ?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에너지는 충분히 이해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았다. 볼테르는 뉴턴의 이론을 대중화하는 노력을 통해 그 신성한 진리를 확고히 믿고 있었다. 즉 물체는 어떻게 접촉하는지 분석할 때 찾아내야 할 핵심요소는 단순히 그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 mv1 라는 것이다. 만약 5 파운드의 공이 10 mph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50단위의 운동량을 갖는다.

하지만 샤틀레는 독일의 대사이자 자연 철학자였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볼 때, 초첨을 맞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mv2 이었다. 만약, 5파운드의 공이 10 mph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5곱하기 102, 500 단위의 에너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관점이 맞을까? 이것은 단순히 정의에 관한 논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좀더 깊은 문제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을 종교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18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뉴턴은 mv1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그것이 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가령 똑 같은 2대의 맥주 트럭이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해보자. 엄청난 충격이 발생하여 범퍼는 찌부러질 것이다. 그러고는 정적이 흐른다. 그것들이 부딪히기 직전 우주에는 많은 mv1 가 있었고, 속력을 내며 달리는 두 트럭은 각각 그 mv1 를 싣고 있다고 해보자. 트럭 하나는 정동(正東)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정서(正西) 방향으로 최고 속도로 달린다. 두 트럭이 부딪히면 나무와 금속의 정지된 덩어리만 남고 두 트럭이 각자 가지고 있던 v1는 사라지게 된다. 정동으로 가는 것은 정서로 가는 것에 완벽하게 상쇄된다.

 

뉴턴의 관점에서 보면 트럭이 한때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는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어떤 구멍이 생성되어 그 에너지를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로부터 다른 어딘가로 끌어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충돌사고는 늘 일어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거대한 톱니바퀴 같은 것이 달린 태엽 시계 안에 살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늘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라.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움직일 수 없는 물체들이 점점 더 쌓여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증거다. 뉴턴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야말로, 기운을 불어넣는 신이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될 모든 원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신호였다.

 

볼테르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뉴턴이 그렇게 얘기했는데, 누가 감히 그와 논쟁하려 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것은 대단한 통찰력으로 보였기 때문에 – 그리고 그것은 정말 엄청나게 복잡한 기하학과 미적분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 그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였다. 하지만 샤틀레는 많은 시간을 와토의 그림이 있는 서재에서 보냈다. 가장자리에 촛농이 덕지덕지 쌓인 책상에 앉아 라이프니츠가 내놓은 반론을 혼자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하고 추상적인 기하학 논쟁에 맞서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접근법이 이 세상에 남겨놓은 틈새를 연구했다. 대사들은 때로 냉소적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뉴턴의 학설에 의하면, 전능하신 신은 때때로 그의 시계를 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곧 움직임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영원한 움직임을 만들 만큼 선명지명이 없는 듯하다.(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우주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고 신은 끊임없이 우주를 돌리는 태엽을 감고 있는가? 이 늦은 밤까지 계속 오는 빗방울 하나하나도 어디 떨어질 지 계획되어 있는가? 신은 그것을 알고 있는가? 과연 우리들의 운명은 결정지어져 있는가? 영국인들이 신처럼 떠 받드는 뉴턴경의 신상 명세와 유명한 운동의 법칙을 기술한 대표적 저서‘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표지 사진입니다. SMLee

 

E=mc2 : 제곱의 법칙

 

(3) 최초의 민간 과학연구소

 

샤틀레의 남편은 시레이*에 별장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콜럼부스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대대로 내려온 것이었는데, 성문이 닫힌 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샤틀레는 그 별장을 프랑스의 순수 과학 연구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별장은 손볼 곳이 많았다. 얼마 후 볼테르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샤틀레는 계단은 굴뚝으로, 굴뚝은 계단으로 바꾸고 있네. 내가 인부들에게 도서관을 만들라고 지시한 곳에 그녀는 살롱을 만들라고 말하지. … 내가 느릅나무를 심으려고 했던 곳에는 라임 나무를 심고 있네. 그리고 내가 약초와 채소를 심은 곳에는…. 오직 화단만이 그녀를 행복하게 할 걸세.

 

공사를 마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거기에는 파리에 있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비견할 만한 도서관과 런던에서 건너온 최신 실험 장비가 있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객실용 방들이 또 한쪽으로는 세미나실들이 나란히 있었다. 곧 유럽의 최고 과학자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샤틀레는 전용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와토의 그림도 걸어 놓았다. 볼테르를 위한 전용 복도와 방도 있었고, 그의 침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통로를 통해 샤틀레의 침실과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번은 볼테르가 미리 얘기하지 않고 그 통로를 통해 샤틀레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샤틀레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자기는 단지 요즘 그의 건강이 안 좋아 보였고, 휴식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다른 남자와 있었던 거라고 해명하였다).

 

베르사유에서 온 방문객들은 비아냥거리듯 아름다운 여인이 실험실 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방문객들은 그녀가 책상에서 일하는 모습과 계산과 변역문으로 가득한 서류더미 주위에 놓여진 많은 양초들, 대강당에 놓여있는 진보된 과학장비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곤 했다. 그녀의 공간에 볼테르도 종종 들어오곤 했다. 그의 방문은 왕궁에 대한 가십을 늘어놓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뉴턴의 라틴 원문을 네덜란드 주석과 비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샤틀레가 위대한 발견을 할 뻔한 기회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녀는 녹을 관찰한 라부아지에의 실험과 흡사한 실험을 시도했다. 만약 그녀가 직접 만든 저울이 조금만 정확했더라면, 그녀는 라부아지에가 태어나기도 전에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시레이 팀은 새로운 스타일의 과학자들과도 우호적인 서신 왕래를 지속하였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어떤 증명이나 도식, 계산 등을 제공하였다. 쾨니그나 베르누이 같은 과학자들은 한번에 몇 주씩, 어떤 때는 몇 달씩 묵으며 연구했다. 볼테르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뉴턴 연구의 기초가 튼튼해 지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와 샤틀레가 서로 야유 섞인 논쟁을 할 때면, 세계적인 사상가인 그가 자기의 젊은 애인이 이길 수 있도록 배려했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샤틀레는 물리학계의 진정한 과학자였고, 물리학계가 풀어야 할 핵심 질문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사람이었다.

 

그건 ‘에너지란 무엇인가?’ 였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여복이 많은 볼테르를 부러워해야 할지 말지…? 그러나 더 이상 에로는 없습니다. 본격 고전역학의 치열한 토론 이제 시작됩니다.

그전에 잠시나마 인구 300여명의 조용한 마을 시레이의 그림 같은 볼테르/샤틀레 커플 별장도 감상하시고.  SMLee

 

 

E=mc2 : 제곱의 법칙

 

(2) 18세기의 지나 데이비스

 

사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약 15년 전, 그러니까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를 방문하면서 본 적은 있었다. 에밀리 드 브레튀이 가족은 파리의 튈르리 공원이 내려다 보이며 30개의 방과 17명의 하인이 있는 대 저택에서 살았다. 그녀의 오빠와 언니들은 무난하게 자랐지만, 에밀리는 달랐다. 에밀리 아버지는 이런 글을 썼다.

“내 막내딸은 콧대가 높아서 구혼자들을 질리게 한다네. 도대체 그 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에밀리가 16세 때 부모는 그녀를 베르사유에 데리고 간 일이 있는데, 에밀리의 행동은 거기서도 두드러졌다. 액션 스타였던 여배우 지나 데이비스가 18세기 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에밀리는 긴 검은 머리에 한없이 순수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사교계에 진출하는 대부분의 소녀들은 단지 남편감을 얻기 위해 외모를 치장하는 데 열중했지만, 에밀리는 데카르트의 분석 기하를 읽었고 장차 구혼자가 될 지 모르는 사람들과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나무타기를 좋아했고 보통아이들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가 그녀의 몸매를 위해 여러 해 동안 펜싱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단한 말괄량이였다. 국왕의 근위대장인 자크 드 브링에게 결투 신청을 한 적도 있었다. 큰 강당에 모인 대중 앞에서 벌인 결투에서 빠르고 강하게 일격을 가하는 모습은, 열렬한 구혼자들로 하여금 그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에밀리는 너무 지적이었기 때문에 베르사유에서 외톨이가 될 때가 많았다. 데카르트와 많은 과학자들의 업적에 대해 탐구하고 놀라운 발견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여러 공식에 푹 빠져들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다. 그녀는 카드놀이 판에서는 카드를 암기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에밀리는 21세 때 좋아한다기 보다는 싫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여 남편으로 삼았다. 그 사람은 뒤 샤틀레라는 부유한 군인이었는데, 멀리 원정을 떠나 있는 날이 많았다. 결혼은 형식적인 계약이었다. 당시의 관습대로 뒤 샤틀레는 자기가 떠나 있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관계 맺는 것을 용인하였다. 에밀리 뒤 샤틀레에게는 꽤 많은 애인이 있었다. 그러나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를 만난 후로는 그하고만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한때 근위대원이었지만 그 직책을 사임하고 능력있는 물리학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미적분을 함께 풀고 좀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페르튀는 북극 탐사를 위해 떠나야만 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체력이 좋다 하더라도 1730년대의 프랑스에서는 20대의 여자가 탐사에 동반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샤틀레는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았다. 이제 어디에서 위안을 얻는단 말인가? 샤틀레는 모페르튀가 마지막 장비를 정비하는 동안, 실의에 빠져 되는 대로 몇 사람과 관계를 맺었지만 모페르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 볼테르가 등장했다.

후에 볼테르는 그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파리에서의 나른하고 논쟁적인 삶에 싫증이 났다. 국왕의 특권과 지식층의 권모술수와 파벌들… 그러던 중 1733년 나는 우연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샤틀레가 볼테르를 만난 곳은 오페라 극장이었다. 아직 모페르튀가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볼테르는 모페르튀야 말로 과학의 발전을 위해 담대하게 그 먼 북극까지 탐험하는 이 시대의 모험가라고 찬양하면서 그를 위해 감동적인 시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샤틀레를 별에 비유하는 낭만적인 시를 바치며, 자신은 최소한 그녀를 북극탐험과 바꿀 신의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페르튀에게 옳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샤틀레는 그리 싫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볼테르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샤틀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이번에는 관계가 되어가는 대로 두지 않았다. 샤틀레와 볼테르는 빠르게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정치 개혁에 관한 그들의 관심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의 초창기 애인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샤틀레는 굉장히 빠르게 말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어요.). 그들은 무엇보다도 과학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안녕하세요 ?

지나 제이비스,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알고 봤더니 제게도 누나 뻘이네요. ~ 할매 냄새, 보더니스씨 생각보다 꽤 구가다예요. 적어도 안젤리나 졸리 정도는 불러 줬어야. 근데 대표적 출연작 중의 하나가 [더 플라이]이네요. 한창 컴퓨터 프로그램 많이 하던 총각시절의 저에게 무척 영감과 인상을 심어주었던 영화입니다. 다시 보고 싶기도 하구요  샤틀레와 지나 데이비스! 확실한 공통점은 하나 있네요. 남자를 물 휴지 바꾸듯 한 것. 가만 들여다 보니 더 플라이에서 공연했던 남자와도 3~4년 같이 살았네요. 촬영때 연기를 너무 진하게 했나 봐, 요즘 날씨도 더워지는데 더욱 화끈한 분위기로 신종 에로 문학의 정수, 일컬어 싸이에로 (sciero, science-ero) 계속됩니다. 용인총각, 줄여서 용총, 와이리 덥노.  SMLee

 

 

E=mc2 : 제곱의 법칙

 

(1) 어느 흠씬 두들겨 맞은 사나이

 

제곱을 통해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고대 시절부터 있어 왔다. 네모난 정원의 한쪽 가장자리에 4개의 보도 블록이 있고 다른 한쪽 가장자리에도 4개의 블록이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블록의 수는 8개가 아니라 16개가 된다. 똑 같은 숫자를 곱해서 제곱을 만드는 이 간편한 부호도 ‘=’가 서양의 인쇄술 발달 과정에서 거친 것과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어떻게 그것이 물리학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제곱이란 부호가 움직이는 물체의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제치고 아인슈타인의 공식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다시 한번 1700년대의 프랑스, 즉 뢰머와 라부아지에가 활약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726 31세의 극작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자신이 프랑스의 권력 체제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지방에서 자랐지만 왕이 주는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귀족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2월 어느 날 저녁, 그는 드 쉴드 공작의 대저택에서 정찬을 대접받고 있었다. 식사 도중, 하인이 그에게 다가와 밖에 어떤 신사가 찾아왔다고 전했다. 밖으로 나간 아루에는 드 로앙 공작이 타고 있는 사륜마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굉장히 부자지만 불쾌한 사람이었다. 얼마 전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아루에를 보자 드 로앙의 수행원들은 아루에를 폭행하기 시작했고, 드 로앙은 마차 안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아루에는 드 로앙이 “일꾼들을 감독하는 모습이었다”고 묘사했다. 어쨌든 아루에는 가까스로 드 쉴리 공작의 집 안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동정심이나 격노가 아니라 웃음 소리였다. 드 쉴리와 그의 동료들은 아루에의 봉변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아루에는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드 로앙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상황은 심각해졌다. 드 로앙의 가족은 권력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루에는 경찰 수색으로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내졌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루에는 영불해협을 건너 분주한 도시의 공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목가적인 동화의 나라 완즈워스*로 갔다. 그 곳에 흐르는 새로운 사상적 기운을 감지하자 그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사상이란 뉴턴의 과학적 발견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루에에게 프랑스에서 경험한 그 케케묵은 폐쇄적 귀족주의의 반대 개념을 제시해 주었다. 뉴턴은 우주에 속해있는 모든 물질들의 운동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자세하고도 정확한 법칙을 발견해 냈다. 행성은 뉴턴이 제시하는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우주 공간을 돌고 있었고, 공중으로 쏘아 올려진 포탄은 뉴턴이 계산한 궤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낙하를 예측했던 바로 그 지점에 정확히 떨어졌다. 마치 우리는 거대한 태엽시계 안에 살고 있으며, 뉴턴이 보여준 모든 규칙들은 그 시계를 작동하게 하는 톱니바퀴 같았다. 만약 우리에게 주변의 행성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 필요하다면, 여기 이 지구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아루에는 의문을 품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이 신의 대역자로서 이 땅에 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민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왕으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았고, 이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실로 불손한 일이었다. 만약 뉴턴의 분석 방법을 정치현장에 난무하는 돈과 허영, 그리고 감춰진 권력의 비리를 들춰내는 데 사용하면 어떨까 ?

 

3년 후 파리로 돌아온 아루에는 편지나 수필을 써서 새로운 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드 쉴리의 문 밖에서 당했던 치욕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명백하고 냉정하게 분석된 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라면. 아루에는 평생 뉴턴의 새로운 사상을 지지했다. 뉴턴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루에라는 이름은 단지 태어나서 가지게 된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본래의 이름을 제쳐두고 우리에게 훨씬 더 친근한 이름인 볼테르라는 필명을 썼다.

하지만 능력있는 작가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어떤 사상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나라를 바꿀 수는 없었다. 볼테르는 그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에 자신의 능력을 투입할 필요를 느꼈다. 국왕의 과학 아카데미는 너무 뒤지고 있었고 지나치게 낡은 사상 속에 갇혀 있었다. 파리의 살롱 (대저택에서 행하는 명사들의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안주인들은 그들의 부를 이용해 온순한 한두 명의 시인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볼테르는 “만약 당신이 내 애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미래는… 망가지고 말거야”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진정한 사색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완즈워스 [Wandsworth]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의 안쪽에 있는 자치구. 템스 강 남쪽, 램버스 강 서쪽에 있다. 원들 강이 이 시를 양분하며, 위그노 교도 망명자들과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이 강 기슭을 따라 의류제조공장들을 세웠다. 초기에는 모자제조업, 사라사 날염, 염색업, 배터시에나멜 생산업, 제지업 등이 주요산업이었다. 오늘날은 경엔지니어링 제품, 맥주, 가스, 페인트, 양초, 인쇄용 잉크 등이 생산된다. 주요공단이 템스 강 유역 완즈워스 다리에서 첼시 다리까지 쭉 이어져 있으며, 배터시 발전소는 유명한 런던의 건축물이다. 면적 35, 인구 266,700(1994). [Daum 백과사전 인용]

 

안녕하세요 ? 놀이도 삼세판이라고 후속편을 독촉하는 독자들에 성화에 못이겨 (?) 최종편 제곱의 법칙을 보내드립니다. 이미 보내드린 과학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은 10%의 수준 높은 독자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약 30%가 되니 계산이 안 맞기는 합니다만  본 편은 알기 쉬운 고전 물리학(역학)의 내용이지만 동시에 성인물 성격이 강하여 직접 원고를 쳐 넣었습니다. 250 여년전 불 같은 삶을 산 한 여인의 일생, 기대하십시오!

 

여러 날 계속되던 비, 장마, 태풍이 물러가고 잠시 맑은 주말이군요. 내일 하루가 우리 일생의 또 하나의 좋은 하루가 되길 빕니다. SMLe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