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災殃)

1996. 9.11

‘천변지이(天變地異) 따위로 말미암은 불행한 변고’를 일컬어 재앙(災殃)이라고 한다. 천변지이는 또 ‘하늘과 땅, 곧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큰 변고’라고 풀이하고 있다.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괴변’ 이라고 풀이되는 ‘천재지변(天災地變)’과 유사하게 쓰이는 말 인듯하다. 그런데 말의 속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변지이’는 어떤 원인에 의한 필연적인 인과(因果)가 얽힌 듯한 반면, ‘천재지변’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의 돌발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몇몇 기록에 의한(대부분이 聖書에 근거함) 재앙의 모습은 다분히 인간생활의 모습에 깊이 기인한다. 즉 잘못되어져 가는 인간생활의 모습들에 대한 징벌들이 재앙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재앙의 모습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제일 큰 특징은 절대자의 인내를 시험하는 인간들의 교만함이 그것이고, 그 다음은 재앙의 징조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어떤 재앙의 장면에서도 미리 예고하지 않은 재앙은 없었고, 또 성서에 기록된 어떤 재앙도 피해나간 기록이 없다.

스케일이 큰 대작(大作) 영화로 유명한 찰톤 헤스톤 주연의 십계(十戒)란 영화가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율 부린너가 이집트의 파라오(이집트의 왕:람세스)로 분하여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로 분한 찰톤 헤스톤의 상대역을 맡았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기의 민족을 구해내기 까지는 파라오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파라오의 강한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모세의 무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10가지 재앙의 무기였다. 온 백성의 몸에 이가 들끓게도 하고, 엄청난 파리 떼가 질병을 확산시키고, 물이란 물은 모두 피로 변하게도 하고, 메뚜기를 동원하여 온 나라의 작물을 상하게 하기도 하다가, 급기야는 이집트라는 나라의 모든 동물이 나은 첫 수컷은 모두 죽게 하는 재앙에 이르러서야 파라오는 굴복을 한다. 죽은 아들을 놓고 처절하게 울던 파라오가 놓아 준 이스라엘 백성을 잡기는 이미 늦어진 시점, 죽은 아들은 다시 살아오지를 못했다. 애초 재앙이 그렇게 큰 피해로까지 이어질 줄 몰랐던 파라오의 회한의 눈물은 때늦은 후회였다.

모든 일이 잘 못 진행되어 가는 양을 보면 당연히 잘못된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많은 전조(前兆)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일시에 모든 것이 급전락하기 위한 전제들이 쌓이고 쌓여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소위 lameduck이란 것도 권력의 말기 증상으로서 권력누수 현상으로 이미 공식적으로 용어화 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실 필요도 없는 단어일 수가 있지만 무리한 권력욕과 함께 시기를 틈타는 인간의 심리가 함께 편승하여 생긴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질서기반 위에서라면 말기라고 해서 누수현상이 생길 까닭이 없다. 재앙은 반드시 원인을 수반한다. 원인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증상은 치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병적으로 확산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가 들끓을 때 파리를 예견했어야 했다. 피가 온 나라를 덮을 때 망국을 예견했어야 했다.

요즘 우리회사의 여러 곳에 눈에 띄지 않는 파리군단들이 많은 모양이다. 파리가 먹성이 좋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일단 파리가 날아 앉아 오래 머물렀던 음식은 여기저기 파리 알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한 음식은 버려야하고, 전체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결을 위한 노력이 별도로 필요하다. 이도 들끓고 있는 것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

근본적으로 이는 동물에 기생하는 곤충이다. 피를 빠는 동물이다.

얼마 전 영국 전역에서 이가 발생되어서 심각하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는데 이라는 동물은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소멸되는 동물인줄 알았더니 딱이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이라는 동물은 故 닉슨 대통령의 재임시절 ‘일본은 이 같은 존재’라고 해서 미국경제에 빌붙어 산다는 강한 핀잔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직에 파리 같은 사람들이 끓게되면 상해 가는 조짐이다. 조직에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면 온 몸이 근지러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근지러움이 오래가게 되면 만성적으로 체질화된다는 것이다.

상해가는 먹이가 있는 곳에 아무리 철저하게 방역을 한다고 해도 원천적으로 몰려드는 파리를 막을 재간이 없다. 이 라는 놈이 서케(이의 알)를 슬기 시작하면 방충제로도 완전히 구제가 되지 않는다.

“곳곳이 썩고 새고 있다.” 는 감사팀의 탄식이 남의 말이 아니다. 한켠에서 위기공유를 외치고 살길 찾기를 외쳐본 들 근본적으로 새는 현상들이 없어지지 않아서야 공허한 외침이다.

얼마 전 그룹회장의 특별지시 사항이 시달되었다. 장기저축 수준을 높여 나가는 것을 통해 외화의존도를 낮추고, 철저한 경비절감과 함께 더 열심히 일하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은 결코 극복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어려움 극복을 위한 솔선참여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위기상황이 아직도 나의 위기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전히 회사가 풍부한 먹을거리로 인식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외압에 의해 쫒겨남을 당하기 전에 조용히 그리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떠날 일이다.

끝내 오늘의 상황이 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욕탕집 남자들  (0) 2014.03.26
엄마가 보고 싶어요  (0) 2014.03.26
논리  (0) 2014.03.26
나머지  (0) 2014.03.26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0) 2014.03.26

논리(論理)

1996. 9. 4

‘I think therefore I am.’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는 이 말을 한 사람을 대륙철학자 데카르트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대륙이라고 표현한데는 그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철학사조를 영국과 유럽대륙으로 구분 지었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논리의 귀결에 걸림이 없다. 사유(思惟)하는 동물이기에 그는 존재(存在)함이요, 존재(存在)함으로서 그는 사유(思惟)할 수 있었다.

수능시험이라는 게 있어서 종생부(綜生簿)니 학생부(學生簿)니 탈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학부형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살생부(殺生簿)아니냐 하는 말이 웃자는 말 같지만은 않다.

어쨌든 대학입학 시험의 변천사에 따라 등장한 소위 논술고사의 영향으로 논리 시리즈 간행물이 제법 재미를 본 모양인데 제목도 재미있다.

‘반갑다 논리야’, ‘논리야 놀자’, ‘재미있다 논리야’ 등. 아마 친숙함의 의도를 염두에 둔 듯하다.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논리를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과정에서 유모어는 교양필수라고 하고...

하여간 논리에 익숙지 않은 우리나라 문화환경에서 논리적이기가 쉽지 않지만, 되지 않는 논리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울리서치와 여원(女苑)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젊은 부부의 인생만족도' 라는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화시간이 부족하고(46.3%), 성생활이 불만스럽고(33.9%),

사는 것이 지겹다(60.3%)라고 나타났다.

또 통계청의 보고에 의하면 1971년에 비해 1991년도에는 이혼이 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중산층 부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68.5%가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했고,

주부의 53%가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래서 21세기 최대의 문제는 가정문제라고 단정짓고 있다. 단순히 통계적 수치만 봐도 문제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심각한 문제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원인의 근저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가정의 생활이 지겹다니 그것이 문제인데, 한 꺼풀 더 원인을 벗겨내고 보니 대화가 없고, 성생활이 만족치가 않다.

결국 모자람이다. 뭔가 꽉 찬 느낌이 들지 않음이다. 대화가 없음은 관심의 부족이다. 시간도 부족하니 이도 부족이다.

그러니 그 뒷 공정(?)이 여의(如意)할 수가 없겠다.

그런데 앞뒤를 생각하면 설문해석 논리에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가정하자. “왜 결혼을 했는가?” 위 설문의 논리대로 하자면

1) 사는 것이 지겹지 않기 위해서(60.3%)

2) 많은 대화를 하려고(46.3%)

3) 만족한 성생활을 위해서(33.9%)

와 같은 답이 나왔어야 옳겠다. 이 문제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위해서는 천상 ‘행복’이라는 매개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결혼이라는 문제는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못하니 행복하지 못함이요, 행복하지 못하니 불행이고, 대부분의 젊은 부부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문제가 21세기 최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쯤 오다보니 문득 천재시인 이상(李箱)이 생각난다. 그의 천재성은 늘 머리에서 번득이고 있었으나 건강치 못한 육체가 짧은 인생을 통해 천재성을 마감시킨다.

그는 자전적 소설을 통해 원만치 못한 부부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허락되지 않는 만족을 위해 부인이 없는 틈을 타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 옷 냄새도 맡아보고,

사방을 킁킁거린다. 화장품 모두를 조금씩 찍어내어 한데 비벼놓고 부인의 냄새를 찾는다.

한 마디로 그는 부인을 지겹게 만든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시간은 넉넉히 가지고 있었지만(비록 인생 전체로는 짧았지만 하루하루는 길었다) 대화가 없었고,

건강이 허락되지 않으니 성생활이 원만할 리 없고, 무엇보다 가정을 책임질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최후까지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삶의 과정이 幸이요, 不幸이요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생활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군더더기다.

그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적정수준의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돈(경제력)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은 경제력 이외에 다른 요소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경제력에 막강하게 대체될 수 있는 강력한 代替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행복한 가정생활의 요체는 몇 가지로 압축이 가능하다. 우선은 생활이 보장될 수 있는 적절한 경제력(생활능력)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가정에 투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남자는 밖에서 능력의 80%만 발휘하라는 충고도 있다.

최소한 20%의 정열은 가정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건강이겠다.

여기서 두 번째 조건과 세 번째 조건은 다분히 개인적 선택이 부분일 것이나, 첫 번째 요건은 귀속적 요건이 될 것이다.

즉 독자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어떤 일을 통해서라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다 못해 이자수입을 통해서라도 확보할 원천이 우선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인 경우 수입의 원천은 자본이 아닌 바에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근로의 반대급부로 취득되는 금품이다.

그 관계는 고용자-회사와 피고용자-종업원이라는 쌍무적 계약에 의해 형성되며 급료의 지급, 근로의 제공이라는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또 이런 관계의 지속이 전제가 된다고 할 때 회사는 종업원의 사회적 신분의 확보와 함께 자아실현이라는 육성 측면의 VISION도 제시 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종업원은 회사에 대해 양질의 근로를 제공함과 아울러 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확대재생산에 기여를 하여야 한다.

이 관계에 있어 선, 후를 논함은 의미가 없다. 또한 이 관계에 있어 서로가 상대에 대한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것도 오만함이다.

왜냐하면 서로의 필요는 수요․공급의 경제원칙이기도 하지만 상호 선택이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개인이 선택한 회사가 덕을 보고 있는 것이요, 개인은 오로지 현실적인 자기희생만 있었기 때문에 보상해야 할 많은 빚을 회사가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과대한 자기 관대화가 아닐 수 없다.

가치는 교환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그 가치는 형평성 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나의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구매를 강요하는 행위에 진배없다. 이쯤에서 논리를 추스릴 필요가 있겠다.

너무 논리가 비약된 것 같아서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건전한 가정을 유지시키는 요소는 대화의 부족과, 성생활의 만족이라는 선택적인 사항도 있겠지만,

행복이라는 매개요소를 삽입하고 나면, 경제력이라고 하는 변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급여생활자를 주 대상으로 할 경우, 경제력의 확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취득의 원천이 되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한 제 2차 집단(직장)의 평화는 내가 지킬 제 1차 집단(가정)의 행복 요건이기도 하다. 국가관도, 철학도, 공공질서도 외곽전자 빠져나간 원소처럼

융합과 분열이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행복이 가끔 난도질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회사가, 희어지는 귀밑머리가, 그리고 암담한 장래가 괜스레 하는 일없이 바쁘게만 만들고, 매사 자신없게도 만들어서 집사람으로 하여금

사는 것이 지겹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 고 자숙의 일침을 가한 김영삼 대통령의 말이 경전의 성구처럼 한 가슴에 반성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또 다른 우려 - 내 인생의 소풍은 즐겁고 있나?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보고 싶어요  (0) 2014.03.26
재앙  (0) 2014.03.26
나머지  (0) 2014.03.26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0) 2014.03.26
웃음의 종류  (0) 2014.03.26

나머지 26%

1996. 8. 27


 아이들에게 내면적인 효(孝)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많은 글들이 있다.

그 중에서 ‘리어왕’ 이라는 동화(엄밀하게는 동화랄 수 없지만)는 비록 외국의 작품이지만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혀짐으로서

진정된 효도라는 것은 겉치레요 입발림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 하였다.

젊어 한때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누리던 리어왕이 귀여운 세 공주와 벌이게 되는 운명의 대화는 후일 리어왕을 현실 상황의 참담한 운명의 거리로 내 쫓는다.

갖은 아양을 다 떨던 두 언니는 목적한 대로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고,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요” 라던 막내 공주가 끝내는 제 아버지에게

드릴 효도를 선물로 바치면서 리어왕의 굵은 참회의 눈물을 통해 값진 것의 실체를 보여주는 짧은 줄거리의 동화다.

성경을 읽다 보면 3년이란 짧은 기간을 공생(共生)의 기간으로 살다 간 예수님의 이적(異蹟)과 기사(奇事)가 소개되는데 특히 병을 고쳐주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30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있던 병자를 일으키기도 하고, 지금까지 불치로 알려진 문둥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귀신 들린 자(미친 사람)를 제 정신으로 돌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행적가운데 아주 실망스러운 탄식의 대목이 나온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거리를 걸어가던 예수님 일행은 어느 마을 어귀에서 돌팔매에 쫓기던 일군(一群)의 문둥병자를 만난다.

병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문둥병자들에게 처방을 내리고 다시 길을 가다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를 만난다.

그는 조금 전에 예수님의 처방을 받아 병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감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어 가능할까?

이 사람의 감사를 받던 예수님의 질문이 여운을 준다. “내가 고쳐 준 이들이 너말고도 여럿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굳이 종교적인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는 당신의 영예를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젊은이의 감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마음에 ‘어찌 너만 감사를 해야 한단 말이냐?’

하는 아쉬움인들 왜 없었겠는가?


 매일 경제 신문에 소개된 일본경제신문 인용기사가 눈길을 끈다. 근로자들의 회사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한 조사결과였다.

회사가 어려울 때 회사를 돕겠다는 응답이 한국 74%, 일본 31%, 인도네시아 88%...

조사 대상국가는 한국, 일본, 프랑스, 태국, 인도네시아였으며, 일본 노동성(우리나라로 치면 노동부)이 이들 나라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인용보도 했다고 한다. 설문의 내용은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함께 있어야 한다’ 는 질문에 대해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비교적 강한 귀속의식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위 설문 내용에서 ‘어떤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좋은 시기보다는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도’ 라는

단서가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면 글줄을 늘려가기 위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편한 해석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있어야 한다’는 뒷 문장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통계조사를 목적으로 실시한 설문의 결과를 맹신(盲信)할 것도 없겠지만, 통계의 결과라는 것은 모집단(母集團)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학문적 전제를 근거로 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특성을 갖는다고 보아 무방하다.


 본디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기간을 두고 주기적인 부침(浮沈)을 겪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일부에서는 87년이래, 지금까지 우리회사는 맨 날 죽는소리만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시절에도 좋은 날이 있었고, 그 날들로 인해 착실히 미래를 준비해 온 일련의 노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 내외적인 환경제약 요소는 그때 그때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경제적인 선택사항 이었을 수도 있겠고...

하여간 소위 그 뜨겁던 여름날의 기억 이후 우리는 심심찮게 ‘무능한 경영진’ 이라는 단어와 함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으로 소개되는

활자매체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간 곳이 없고 ‘너나’ 라는 상대만 있어서, 회사라는 실체는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드는...

그리고 그것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과적인 현상이 아닌 것임에 서글픔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의 협조자가 항상 곁에서 회사와 염려를 같이 하겠다는 내용은 그것이 비록 다른 나라에서 조사되고 발표된 것이라고 해도

참으로 반가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31.6%로 가장 낮은 반응을 보였다는 일본의 우려가 저변에 깔린 조사결과일 것이고 보면, 국민의 생활수준을 염두에

두었음직도 하다. 이를테면 민도가 낮을수록 귀속의식이 높았다는 식의... 그런데 다행히 미국과 프랑스 등도 각각 66%와 61.8% 의 수긍정도를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에 비해 후진국으로 분류될 수 있는 태국이 62.8%로 미국보다도 낮은 긍정도를 보이고 있어서 자료 해석상의 편견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것인데, 조사결과는 그 부분을 밝히고 있지 않다.

설문 구성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약한 부정 + 강한 부정」의 합이 그 나머지를 구성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은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회사가 어려울 때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머지 26%는 지금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일만여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시위가 조국통일의 행보를 몇 보(步)나 빨리 진척시킬 것이며,

천만 이산가족의 한(恨)을 어떤 손으로 매만져 줄 것이며, 마음 속 깊이 부모님들이 두고 온 고향이 통일되기를 기리면서 국토종주를 하던

월남가족 2, 3세의 한 서린 눈물에 어떤 보상이 될까?

 리더의 조건 중에는 대세를 가늠하여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능력이 으뜸이다. 이성계가 한 나라의 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까래 3개를 등에 진

꿈의 실현이 아니고, 대세를 읽고 민의를 따랐음이다.

오늘 진정한 화두(話頭)는 74%와 26%의 의미와 함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되묻던 예수님의 참담한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앙  (0) 2014.03.26
논리  (0) 2014.03.26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0) 2014.03.26
웃음의 종류  (0) 2014.03.26
차이  (0) 2014.03.26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1996. 8.19

‘할아버지 복서 홈즈 추억 속으로’ 78년부터 88년까지 세계 헤비급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래리홈즈의 은퇴경기를 지켜 본 기자는 대미를 화려하게 KO승으로 장식하고 은퇴하는 홈즈를 놓고 기사 제목을 그렇게 뽑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홈즈의 말을 인용했다. “이제는 자라나는 젊은 선수들을 상대하기가 벅차다.” 그러니 과거의 화려한 명성을 얻게 해 주었던 링을 이제는 떠나겠다는 것이다.

동일 자 다른 신문에는 또 다른 스포츠 영웅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칼 루이스, 美 멀리뛰기 선발전 곤욕’ 칼 루이스가 누구인가? 그야말로 미국의 자존심이 아니었던가? 이미 100m 예선에서 탈락한 칼 루이스가 멀리뛰기만큼은 아직 자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자의 눈은 냉정하기만 하다. - 결국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기는 했지만 -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는 것은 보기가 좋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점점 무기력해져 가는 자신에 모습에 비추어 대리 심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세계의 권투 영웅 차베스가 떠오르는 별 호야에게 무너지는 장면을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패배를 안타까워했고, 한국의 예로 들어와 프로야구 원년 우승의 주역인 박철순이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진단을 딛고 다시 마운드에 올랐을 때 가슴 찡한 감동으로 ‘인간승리’를 얘기했었다.

그러나 어쩌랴. 가는 세월 속에는 분명 나의 시기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시쳇말로 ‘왕년에’ 라는 말이 있다. 의미적으로 상스러운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들으면 껌을 짝짝 씹으면서 한쪽 다리를 흔들거리는 건달패가 연상되는 것은 결코 잘못 된 인식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왕년’ 이라는 단어가 주는 말의 의미가 현재의 능력에 견주어 본 화려한 과거의 경험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 까닭이라서 그렇다.

혁신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성공체험’ 이라고 한다. 물론 성공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컷을 것이고, 개인적인 성장에도 큰 몫을 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후배들에게 들려 줄 훌륭한 성공담은 얼마나 풍성할까? 그러나 소련제국의 붕괴와 탈 냉전을 이끌어 낸 20세기의 거인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대선 7위의 수모를 딛고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쓸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과거 그의 정치적 성공을 낮게 평가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영웅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바람이 더 크게 작용하는 심리적 요인과 함께 현실이라는 세월의 변화를 억지로 맞서 보겠다는 의지 아닌 오기가 그를 점점 더 작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이다.

과거의 성공체험에 연연해서 오늘의 변화를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다시 한번 60년대의 그것으로, 70년대의 그것으로 방치해 두고 ‘옛 것은 좋은 것이여’ 하는 자위로 만족하자는 책임 없는 발상에 다름이 아니다.

“미친 시대는 미친 관리자를 요구한다.” 는 톰 피터즈의 경고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거의 화려한 명성 때문에 미래의 후회를 용인하지 말자.

갤럽의 조사결과에서 나타난 현대의 위상이 사뭇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러다가는 정말’ 하는...

註 : 갤럽 연구조사 결과 기업에 대한 인식도 측면에서 삼성과 LG에 비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나타났음. 일반인 1,300명, 대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호감도, 우수성, 인지도의 3분야를 조사함.

3대 그룹의 종합적 이미지 순위 : 삼성, LG, 현대 순임

각 그룹의 10년 후 위상 예측 : 삼성, 현대, LG 순임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리  (0) 2014.03.26
나머지  (0) 2014.03.26
웃음의 종류  (0) 2014.03.26
차이  (0) 2014.03.26
비가 오면 새들은...?  (0) 2014.03.26

웃음의 종류

1996. 8.13

 감정의 표현과 관련해서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 아닌가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이 웃는 것을 봤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개가 웃는 것도 봤다고는 하는데, 비슷한 세월을 살아 온 경험자들 중에 몇몇 사람들에 의해 어쩌다 관찰된 특이한 상황의 기이한 현상을 일반적인 것으로 취급함에는 무리가 있다 하겠다.

하긴 붕어가 웃는다고 해도 그 뿐이고, 고사 상에 돼지가 빙긋이 웃는다고 표현을 하기도 하니까 굳이 아니라고 단정지어 논쟁의 거리로 삼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란 동물의 얼굴표정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몇몇 특징적인 기관의 움직임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헌데 사진에 찍혀서 나오는 얼굴 모습의 찡그러짐을 보면 큰 웃음과 큰 울음의 그것이 많이 닮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끼리는(인간들) 그 표정에서 배어 나오는 감정의 형태를 기쁨과 슬픔으로 구별 할 수 있는 경험적 식견이 있어서 식별이 가능하지만, 다른 동물들이나 감정 표현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외계인들의 눈에 비친 그 표정들(웃음과 울음)은 명쾌하게 식별이 안될는지도 모른다.

김용호라는 시인은 역설(逆說)이라는 그의 시를 통해 ‘극(極)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또 그렇게 가까웠다’라고 첫 연을 시작하고 있다. 그야말로 역설적인데,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 발생될 수 있는 갈등의 요소가 그렇게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가깝다는 것과 멀다는 것의 주체가 되는 것은 육체가 속한 거리를 의미함이 아니요, 그 안에 내재한 마음의 당김 정도가 정(情)의 깊이가 되려니 참으로 가깝지만 먼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슬픈 내용의 노래가 점점 숨가쁜 율동 속에 표현되는 이해 못할 세태 가운데 복고풍 노래 ‘도로 남’이란 노래가 이채로운데 그 내용 또한 김용호의 역설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지우면 님이 되고, 또 다시 점을 찍으면 도로 남이 된다’는 가사의 노래. 동일한 환경 여건 가운데서도 주인 됨과 남 됨이 공존하는 이유, 그것도 노랫말로 쓰여져 읊조려짐직한 소재가 아닌지 모르겠다.

 

 중앙집회가 끝난 운동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휴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더욱 그렇다. 웃음은 분명 인간이 가지는 표현인데, 어떤 마음 상태에서의 표현인가에 따라 종류가 다단하다. 꼭 한가지 웃음만이 아니다. 통상 웃음이 가지는 사전의 의미가 ‘웃는 소리’, ‘웃는 일’로 설명이 되어있고, 이의 으뜸꼴인 ‘웃다’는 기쁨이 매개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즉 기쁨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웃는 것이란 말인데, 인생사는 여전히 복잡한 것이어서 이 웃음에 대해 잠시는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우선은 기쁨을 나타내는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큰 것 순으로 정리하다 보면 몇가지 표현이 눈에 띈다. 파안대소(破顔大笑), 박장대소(拍掌大笑)가 큰 웃음의 종류에서 대표적인 것인데 이를 뛰어 넘는 의미의 웃음에 포복절도(抱腹絶倒)가 있으니 참을 수가 없어서 배를 안고 뒹굴며 웃는 것을 의미하고 그 비슷한 말로 봉복절도(捧腹絶倒)가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아주 잔잔한 웃음을 미소라고 하며, 미소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잔잔함’이라는 의미가 같을 뿐 의미가 전혀 다른 미소(媚笑)와 미소(微笑)가 있다. 앞의 웃음은 영어로 ‘a coquettish smile’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coquettish가 의미하는 바가 ‘남자를 후리는, 남자에게 아양을 부리는, 교태를 부리는, 요염한’이라고 하니 저고리 고름 살짝 물고 배시시 웃는 눈웃음이 아니겠나 싶다. 크기에 있어서는 비슷한 정도가 되겠지만 부처님의 은유를 깨달은 제자의 웃음으로 설명되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있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위의 웃음과 비교할 때 다소 격은 떨어지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미 다 알아’ 하는 교만함의 은근한 표현이나, ‘쓸데없는 소리 하고있어’ 하는 의미의 웃음으로 소위 코웃음이라는 것이 있고, 되어지는 결과가 전혀 뜻밖의 양상으로 전개될 때 터져 나오는 헛웃음(失笑)이 있으며, 마지못해 웃음을 흘리면서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고소(苦笑)가 있다. 이렇듯 많은 웃음의 종류들은 다만 구분의 논리로 구분을 지어봤을 뿐 그 쓰임새에 있어서는 경우를 한정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전혀 크게 웃지 않을 상황에서도 분위기에 따라 박장대소하면서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작 큰 웃음이 따라야하는 경우에도 코로 웃고 말거나 어이없다는 失笑로 진정한 가치를 애써 외면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앙일보 사태를 놓고 각 신문사의 앞 다투기 식 ‘삼성 깍아내리기’ 보도는 기사의 공정성과 사실성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보다는 ‘또 다른 신문 구독 부수 확장전략이 아닐까’ 하는 의아심 마저 든다.

 

 이쯤에서 힘찬 21의 고민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오는 웃음의 종류를 보자. 결론적으로 배경의 근원이 파안대소나 포복절도, 박장대소 할 기쁨의 발원은 아니었으니 제외하기로 하자. 그러나 적어도 함께 가자 하는 변화의 길이 失笑나 苦笑, 또는 비웃음의 차원에서 각기 편할 대로 해석할 성질의 것도 아닌 듯 싶다. 진정한 고민의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고개 끄덕거림이 절실히 요청되는 ‘위기상황의 공유’가 그 저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오늘의 환경을 놓고 그 전대로 하루 또 하루를 살아나가다 보면 우리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역관성(逆慣性) 속에서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찾는데 많은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금메달의 꿈이 예선탈락으로 끝나버린 사격선수 김미정은 의외의 결과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실망을 주지 않겠다고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그 시간 코칭 스태프는 어이없는 결과에 失笑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행히 기회가 있어 김미정 선수의 약속이 실현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리 오랫동안 실패한 선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위한 피나는 노력도 때로는 참담한 실패로 끝날 수가 있고, 온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도 국민도 그가 흘린 땀의 양을 가늠하여 때로는 용서도 하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 것이다. 힘찬 21에 실린 기대는 어떤 빛깔의 메달을 기대하면서 성원을 보내고 있는 걸까?

또 그 마음속에 품고 있는 웃음의 종류는 어떤 빛깔일까?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머지  (0) 2014.03.26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0) 2014.03.26
차이  (0) 2014.03.26
비가 오면 새들은...?  (0) 2014.03.26
디딤돌과 걸림돌  (0) 2014.03.26

차이(差異)

1996. 7. 18

학원 폭력을 근절하라는 대통령의 특명도 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연일 여중생의 출산과 성추행을 고발하고 죽음을 택했던 초등학생의 자살소동이 지면을 덮더니 오늘은 학원 폭력 사태가 ‘무서운 고교생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철학 부재의 세상에 가치부재의 행동들로 나타나는 이 시대의 단면이 노출되는 현상적인 문제를 치유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망가져 가는 자연 속에서 떠오르는 붕어 떼처럼, 생태계의 파괴는 죽음이 이르기 전에 어떤 류의 것이든 일단의 부작용을 선결시킬 터이다.

성도덕의 문란함과 폭력조직의 난무 등도 그 부작용의 일례는 아닐는지...

3년 전인가 일본에서는 통상압력을 견디지 못해 미국 상품을 대거 수입해서 백화점 등에서 판매했던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자국제품의 우수성을 믿는 일본 소비자의 외면으로 코 큰 사람들의 공갈이 머쓱해지게 되었지만.

우리나라가 29번째로 OECD 가입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명실상부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는구나 하는 자족의 노래보다는 “어쩌려구...”하는 우려의 소리가 더 높은 까닭은 못갖춘 마디의 한편이 아리기 때문이다.

선택과 적응의 문제가 이원화된 별개의 것이 아닐진대 오늘날 커져버린 갭의 높이가 절망스럽다. 대통령의 특명이 일선 경관들의 근무지침으로 전달될 때까지는 몇 단계의 지시를 거칠 것이며, 막상 몸으로 실행에 옮겨야하는 경관들의 마음속에 와 닿는 대통령의 의지는 얼마만큼 작아질까?

외제 선호와 과소비를 추방하자며 ‘외제담배 수입 10억불’, ‘수입양주 10억불’, ‘골프용품, 호화 건축자재 15억불’ 이라고 쓴 모형제품을 화형 시키는 행위들이 정작 그러한 상품의 소비자들에겐 어떠한 절박감으로 와 닿을까? 이를테면 외제수입차의 번호판을 구별하지 말도록 종용하던 양심가(?)들의 심경엔...

외국상품을 외면하던 일본인의 자긍심과, 심각한 현실을 화형 시키는 깨어있는 양심들의 외로운 함성이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만큼이나 큰 무게의 차이로 느껴진다.

사람의 절박한 고민이 가슴으로 납득되지 못하고 지적수준에서 이해되는 현상적인 문제가 학원폭력이 없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심경이 일선 경관의 발끝에 못 미치는 것만큼이나 황소걸음에 세월을 맡긴 듯한 의연함이 여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오늘이다.

“흩어지면 죽는다”고 확성기를 타고 나오는 노동운동가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우리의 함성이 되어야 할텐데...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아버지 복서와 고르비  (0) 2014.03.26
웃음의 종류  (0) 2014.03.26
비가 오면 새들은...?  (0) 2014.03.26
디딤돌과 걸림돌  (0) 2014.03.26
뻐꾸기가 울어야 여름인가?  (0) 2014.03.26

비가 오면 새들은...

1996. 7. 8

사람이고 짐승이고 저 나름대로 살 방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물 중에 유독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타고났다. 아마 지각의 발달정도는 고민의 두께와 맥을 같이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집중폭우로 축대가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고, 인명사고로 이어졌으니 비가 오면 와서 고민, 가물면 가물어서 고민, 그게 또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양이 아닐른지...

그렇긴 해도 불륜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서 주변의 두 사람을 때려서 죽게 하고, 목 졸라 죽게 했던 강심장은 지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고 있는 걸까? 그런들 그 유족들의 통탄할 가슴은 또 무엇으로 변상될까?

비가 오면 새들은? 이란 생각은 우연치가 않다. 비에 흠뻑 젖은 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디에 쓰려는지 부리에는 나뭇가지 같은 것을 하나 물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 옮겨가던 새의 모습에서 살아 있음의 생동감보다는 처연함이 느껴지는 것은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한 仁의 마음 惻隱之心의 발로라고만 하면 너무 학문적이란 생각이 든다.

작년 여름엔가 뻐꾸기의 생태를 촬영한 기자가 큰상을 받았다고 하고, 아파트 단지에서는 파렴치한 뻐꾸기가 자녀 교육상 좋지 않다 하여 뻐꾸기 시계가 수북히 버려졌다고 하던데...

천성적으로 둥지가 없는 그 놈은 또 그렇다고 하고, 대부분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새둥지의 특성상 비에 대해서는 전혀 무방비 하지 않은가?

물론 가옥구조(?)상 물 빠짐이야 엄청나게 좋겠지만 위에서 내리 붓는 빗줄기에는 어떻게견뎌내랴 싶다. 그도 아직까지 노란 부리에 날개 짓도 못하는 새끼가 있을 양치면 천상 어미새가 품고 있을 일 아니겠나.

괜한 걱정도 꼭 비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한 두해 겪는 것도 아니고 매년 겪는 일일진대 철새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텃새들은 ‘용불용’이니 ‘진화’니 하는 영향을 받아서 가옥구조를 좀 바꾸어 봄직도 하련만 여전히 새 둥지는 새 둥지다. ‘그것은 자연 아닌가? 이치요 조화고 나름대로 살 방도가 있기 마련이지’ 한다면 참으로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반복적인 불신의 잔재들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현실은 곧 비맞아 날개를 움츠리고 있을 비 오는 날 새의 모습을 연상케해서 답답함이 있다.

얼마전부터 소위 ‘열린경영의 실현’ 이라는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는 경영현황 설명회에서 정확한 실정 전달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이미 알려진 대로 최근 조선시황이 엉망이고 보니 수주문제가 심각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고, 아직은 우리회사의 사업구조상 조선포션이 엄청나게 높다보니, 회사전체가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또 쇼한다, 임단협을 앞두고”, “조선 경기라는 것은 호황 불황을 늘 겪는 건데 뭘”

“너무 안되는 부분만 부각시키는 것 아냐? 괜히 현장 기죽이고 있어...”라는 반응들 이라고 하니 열린경영이 무색하다.

둥지를 개조할 능력이 없는 새는 새라고 하자. 끝내 닥치고 말 커다란 빗줄기를 맨 몸으로 맞으며 “아하, 그 때...” 라는 후회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비가 오면 새들은 피해있을 둥지를 따로 마련하는 지혜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음의 종류  (0) 2014.03.26
차이  (0) 2014.03.26
디딤돌과 걸림돌  (0) 2014.03.26
뻐꾸기가 울어야 여름인가?  (0) 2014.03.26
반비례  (0) 2014.03.26

디딤돌과 걸림돌

1996. 7.1

경주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석굴암을 단체 관람할 때 안내자는 우선 그 규모의 웅장함과 건축기술의 치밀함을 자랑한다. 그 다음은 석불의 본체를 이룬 그 큰돌을 그 당시의 운반장구로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옮겨 왔을까에 관심을 도달시킨다.

“우리 어릴 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기를 예사로 했단다.” 하는 아버지의 말에 “굶기는 왜 굶어요,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한다는 현실의 대화에서 보듯, 오늘날의 시각에서 그 정도의 돌을 들어 옮기는 것이야 문제가 될 것도 없다. 허나 그 시절이라면...

모르긴 해도 그 큰돌을 옮기기 위해서는 길 고르는 작업을 먼저하지 않았겠나 싶다. 패인곳을 메꾸고, 높은 곳은 깍아내고, 운송에 장애가 되는 큰돌들은 파내기를 반복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 끝에 매달려 끌고, 또 끌고, 그러기를 여러 날 했을 터이다.

그 과정에서 그 큰돌이 밑으로 다시 굴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버팀 돌도 괴었을 터이고...

하여간 그 역사를 일구어 내기 위한 과정의 노력 중에는 크게 도움을 끼칠 수 있었던 고마운 돌도 있었겠고, 흘러내리는 땀이 더욱 괴로워지는 골치 아프게 뿌리깊은 걸림돌인들 왜 없었겠나? 그러나 역사의 현장 속에 있던, 노동을 제공해야만 했던 민생들에 있어 가장 큰 마음 속의 걸림돌은 자기들이 끌고 가야만 했던 그 큰 돌덩어리가 아니었을까?

당시 강제에 의해 억지로 제거된(억지로 옮겨진) 걸림돌의 위용은 오늘 후세에게 선조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보물로 존재하고 있다. 마음 속에 장애로 느끼던 그 시절 민생들의 강제 참여에 의한 고생은 결국 이렇게 찬란한 결실로 칭송 받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다면 뉘라서 ‘인생은 고해’ 라는 진리를 선뜻 수용할까?

최근 서울 민선시장이 엄청난 곤욕을 겪고 있다고 한다. 취임 후 일년이 넘도록 지상과제인 교통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무능한 시장이라는 볼멘 소리들이 나오는 모양이다. 해서 민선시장은 관계 요로의 천 여명 인사에게 협조를 구하면서 좋은 대책이 없겠느냐고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인들 무슨 대책이 있겠느냐는 것이 주변의 여론이고 보면, 결국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가 현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시 교통문제 해결이라는 과제에 있어 걸림돌은 무엇인가? 또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 나갈 주체는 누구인가? 그 방법을 택함에 있어 예외가 있다고 한다면 누가 그 대상이 될 수가 있을까? 혹시 서울시장일까?

오늘 힘찬 21을 바라봄에 있어 ‘강요되는 변화가 참으로 싫다’ 라고 한다면, 스스로 변화함이 없이 시대변화를 따라갈 수 있는 예외자는 누구일까?

되짚어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걸림돌은 무엇일까?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음의 종류  (0) 2014.03.26
차이  (0) 2014.03.26
비가 오면 새들은...?  (0) 2014.03.26
뻐꾸기가 울어야 여름인가?  (0) 2014.03.26
반비례  (0) 2014.03.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