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가 울어야 여름인가?
1996. 6. 24
언제부턴가 나랏님을 소재로 한 만평들이 자유롭게 게재되기 시작했다. ‘영상, 영상’ 이라는 코미디 프로가 특정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프로 명칭을 바꾼 후 코미디 프로에서 점차 임금님을 등장시키는 풍자 코미디가 자율적(?)으로 없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6월 11일자 문화일보 만평에 곳곳에서 새고 터지는 국정의 현안문제와 꼬일대로 꼬인 여야문제의 한 가운데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당혹스러워 하는 어떤 사람이 용접기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림이 상징적으로 실렸다.
이미 불거져 나온 일들을 사후 수습하느라 분주하기는 하지만 해결한다고 해도 크게 공이 나지 않는 그러한 문제에 매달려 있는 국정의 현상들이 잘 나타나 있다. 진정 국민이 원하는 바를 잘 모르는 것일까? 무엇이 현안의 문제인지를 모르는 것일까?
쌀 수입문제를 놓고 심각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정부의 정책은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둔 형국으로, 결과적으로는 여론의 비난을 받는 꼴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면 국민의 의식수준도 자연히 올라가는 모양이다.
우리 회사 본관 식당 앞 화단에 철 이른 코스모스가 피었다.
“허 그놈 벌써 피었네”하는 신기한 느낌을 줄 수는 있겠지만 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그런 코스모스는 아니다. 우리의 사계절은 계절의 특색과 함께 그 모양을 바꾸어 간다.
‘진해 군항제’를 알리는 소식과 함께 봄이 오고, 운치 있게 울어 제끼는 밤 개구리 소리와 함께 여름이 성큼 다가와 무궁화가 피고 백 날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산골 마을 밥짓는 냇내(연기냄새)가 등산객의 코를 향수로 자극할 때 가을은 깊어지는 밤과 함께 겨울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4계(季)는 피부나 눈으로 느끼기에 앞서 마음속에 달려오고, 달력속의 빨간 동그라미들이 이미 계절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앞산에 뻐꾸기가 구성지게 울지 않으면 아직도 여름이 아닌 것일까?
오늘의 변화를 보고 느끼고자 하면 이미 늦게 되는데도, 우리는 아직까지 변화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아직도 현대중공업의 뻐꾸기는 울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는 혹서의 여름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