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26%
1996. 8. 27
아이들에게 내면적인 효(孝)의 가치를 깨우쳐 주는 많은 글들이 있다.
그 중에서 ‘리어왕’ 이라는 동화(엄밀하게는 동화랄 수 없지만)는 비록 외국의 작품이지만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혀짐으로서
진정된 효도라는 것은 겉치레요 입발림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 하였다.
젊어 한때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누리던 리어왕이 귀여운 세 공주와 벌이게 되는 운명의 대화는 후일 리어왕을 현실 상황의 참담한 운명의 거리로 내 쫓는다.
갖은 아양을 다 떨던 두 언니는 목적한 대로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고,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요” 라던 막내 공주가 끝내는 제 아버지에게
드릴 효도를 선물로 바치면서 리어왕의 굵은 참회의 눈물을 통해 값진 것의 실체를 보여주는 짧은 줄거리의 동화다.
성경을 읽다 보면 3년이란 짧은 기간을 공생(共生)의 기간으로 살다 간 예수님의 이적(異蹟)과 기사(奇事)가 소개되는데 특히 병을 고쳐주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30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있던 병자를 일으키기도 하고, 지금까지 불치로 알려진 문둥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귀신 들린 자(미친 사람)를 제 정신으로 돌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행적가운데 아주 실망스러운 탄식의 대목이 나온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거리를 걸어가던 예수님 일행은 어느 마을 어귀에서 돌팔매에 쫓기던 일군(一群)의 문둥병자를 만난다.
병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문둥병자들에게 처방을 내리고 다시 길을 가다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를 만난다.
그는 조금 전에 예수님의 처방을 받아 병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감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어 가능할까?
이 사람의 감사를 받던 예수님의 질문이 여운을 준다. “내가 고쳐 준 이들이 너말고도 여럿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굳이 종교적인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는 당신의 영예를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젊은이의 감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마음에 ‘어찌 너만 감사를 해야 한단 말이냐?’
하는 아쉬움인들 왜 없었겠는가?
매일 경제 신문에 소개된 일본경제신문 인용기사가 눈길을 끈다. 근로자들의 회사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한 조사결과였다.
회사가 어려울 때 회사를 돕겠다는 응답이 한국 74%, 일본 31%, 인도네시아 88%...
조사 대상국가는 한국, 일본, 프랑스, 태국, 인도네시아였으며, 일본 노동성(우리나라로 치면 노동부)이 이들 나라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인용보도 했다고 한다. 설문의 내용은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함께 있어야 한다’ 는 질문에 대해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비교적 강한 귀속의식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위 설문 내용에서 ‘어떤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좋은 시기보다는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도’ 라는
단서가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면 글줄을 늘려가기 위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편한 해석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있어야 한다’는 뒷 문장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통계조사를 목적으로 실시한 설문의 결과를 맹신(盲信)할 것도 없겠지만, 통계의 결과라는 것은 모집단(母集團)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학문적 전제를 근거로 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특성을 갖는다고 보아 무방하다.
본디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기간을 두고 주기적인 부침(浮沈)을 겪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일부에서는 87년이래, 지금까지 우리회사는 맨 날 죽는소리만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시절에도 좋은 날이 있었고, 그 날들로 인해 착실히 미래를 준비해 온 일련의 노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 내외적인 환경제약 요소는 그때 그때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경제적인 선택사항 이었을 수도 있겠고...
하여간 소위 그 뜨겁던 여름날의 기억 이후 우리는 심심찮게 ‘무능한 경영진’ 이라는 단어와 함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으로 소개되는
활자매체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간 곳이 없고 ‘너나’ 라는 상대만 있어서, 회사라는 실체는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드는...
그리고 그것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과적인 현상이 아닌 것임에 서글픔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의 협조자가 항상 곁에서 회사와 염려를 같이 하겠다는 내용은 그것이 비록 다른 나라에서 조사되고 발표된 것이라고 해도
참으로 반가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31.6%로 가장 낮은 반응을 보였다는 일본의 우려가 저변에 깔린 조사결과일 것이고 보면, 국민의 생활수준을 염두에
두었음직도 하다. 이를테면 민도가 낮을수록 귀속의식이 높았다는 식의... 그런데 다행히 미국과 프랑스 등도 각각 66%와 61.8% 의 수긍정도를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에 비해 후진국으로 분류될 수 있는 태국이 62.8%로 미국보다도 낮은 긍정도를 보이고 있어서 자료 해석상의 편견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하는 것인데, 조사결과는 그 부분을 밝히고 있지 않다.
설문 구성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약한 부정 + 강한 부정」의 합이 그 나머지를 구성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은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회사가 어려울 때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머지 26%는 지금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일만여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시위가 조국통일의 행보를 몇 보(步)나 빨리 진척시킬 것이며,
천만 이산가족의 한(恨)을 어떤 손으로 매만져 줄 것이며, 마음 속 깊이 부모님들이 두고 온 고향이 통일되기를 기리면서 국토종주를 하던
월남가족 2, 3세의 한 서린 눈물에 어떤 보상이 될까?
리더의 조건 중에는 대세를 가늠하여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능력이 으뜸이다. 이성계가 한 나라의 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까래 3개를 등에 진
꿈의 실현이 아니고, 대세를 읽고 민의를 따랐음이다.
오늘 진정한 화두(話頭)는 74%와 26%의 의미와 함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되묻던 예수님의 참담한 음성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