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가족

 

                                             - 정영

 


푸른 달의 모퉁이를 돌면 가파른 계단 위
에 바람들의 낮은 방, 나는 인간의 마을로
돌아갈 날짜를 세며 어둠을 뜯었다 폭풍의
날들은 지루했고 달은 반쪽뿐이었다, 사랑
을 잘못 발음하는 어린 남자가 살던 곳, 바
람을 마셔 부푼 영혼들의 마을


취한 바람들은 저희들끼리 끌어안았다
길 끝은 장례식장 같았다 창을 열면 기차
가 갔다 몸속의 밀입국자들이 기차를 타려
고 뛰쳐나갔으나 아내들의 손에 붙잡혀 돌
아왔다, 바람이 낳은 자손들의 마을


몸이 부푸는 뜻을 알고 바람을 탈 줄 알
게 됐다 바람이 머리칼 헝클면 그러라고,
바람이 치마폭 들춰대면 그러려니, 바람이
자식을 낳으면 그러자고, 바람이 그만 떠
나자면 그렇게 따라나설 듯이 바람과 몸 섞
고 살아온 생, 바람을 파는 상점들의 마을


마을의 강은 좁디 좁았다

나무배마다 잠든 연인들이 흰 꽃으로 피었다

허덕허덕 꽃잎을 주워먹던 영혼들과

바람을 잡아탄 바람들은 또 일가를 이루려

어딘가로 불어갔다

 

 


TV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파리 에펠탑에서 종이비행기를 던지면 어디까지 날아갈 것인지 실험하는 모습을

봤어요. 종이비행기는 멀리, 카메라가 잡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까지 날아갔죠. 바람만 있으면 그렇게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제가 왜 몰랐겠어요. 그럼에도 바람에 둥둥 떠 가는 종이비행기를 보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저게 뭔가? 우리도 바람만 있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뜻인가? 그럼 그런 바람은 도대체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마음이 비닐봉지처럼 자꾸만 날아가려고 두근두근, 아니 펄럭펄럭.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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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계간 『애지』 2009년 겨울호 발표

    도시귀농 프로젝트

                  --미래에서 부친 편지

 

                               이문재

 

 

  나는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거기서 땅을 놓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나는 도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땅에 뿌리박은 삶을 꿈꾸었습니다. 이곳의 도로와 빌딩은 악이고, 그곳의 산과 들이 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도시에서 오직 미래를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나와 너는 옳지 않고, 내일의 우리와 그들이 바람직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왔습니다. 하마터면 그때 도시를 떠날 뻔 했습니다.

  그 사이, 앞과 뒤가 바뀌었습니다. 좋았던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미래에서 돌아왔습니다. 과거에서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도시가 더 화급했습니다. 도시 안에서 도시와 더불어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가 미래였습니다. 도시 간척--.

  우리는 도시를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걷어냈습니다. 간선도로 위에 고가도로를 올려 그 상판을 농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빌딩과 아파트, 학교 옥상 위에도 흙을 올렸습니다. 그 사이 많이들 싸웠습니다. 대통령이 몇 번 물러났습니다. 초국적 기업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도심을 뒤엎기도 했습니다.

 

  그해 봄, 대통령궁 안에서 모내기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시청 앞에서 토마토를 땄습니다. 겨울에는 고가도로 농장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했습니다. 도시가 푸르러졌고, 사람들이 자기가 키운 먹을거리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도시귀농을 배우러 오는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자동차를 버린 중국 대학생, 댐을 폭파한 인도 정치인, 핵발전소를 폐쇄한 러시아 과학자, 국가의 복지정책을 거부한 스칸디나비아 교사도 찾아왔습니다.

 

  나는 얼마 전 도시를 떠나왔습니다. 도시 곳곳에 마을이 생겨났고, 그 사이 시골은 또 시골다워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만 접어야겠습니다. 이웃 중강진할머니 댁에서 손주 돌잔치를 벌인다는 전갈입니다. 소식 또 전하겠습니다. --가까운 미래에서 부칩니다.

  

                                                                                    <현대문학> 2010년. 2월호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그러나 내 인생의 1부는 끝났다 나는 2부의 시작이 마음에 들어

많은 가게를 드나들어야지 새로 태어난 손금들을 따라가야지

좀더 근엄하게 내 인생의 2부를 알리고 싶어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3부의 수프는 식었고 당신의 입술로 흘러드는 포도주도

사실이 아니야 그렇지만 인생의 3부에서 다시 말할래

나는 내 인생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아들도 딸도 가짜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튼튼한 꼬리를 가지고 도끼처럼 나무를 오르는 물고기들

주렁주렁 물고기가 열리는 나무 아래서

내 인생의 1부와 2부를 깨닫고

3부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내 인생!

마음에 드는 부분들이 싹둑 잘려나가고

훨씬 밝아진 인생의 3부를 보고 있어

나는 드디어 꼬리 치며 웃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어서 좋았던 건 뜨거운 차를 마실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이죠. 겨울이 시작될 무렵,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머나먼 미국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이런저런 차를 가득 담은 상자가 배달됐어요. 나름 나 자신에게 건네는 월동장구라고나 할까요. 겨울에는 뜨거운 물로 몸을 좀 덥혀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이죠. 그리고 컵에 부은 뒤, 티백을 넣지요. 몇 분이 남아요. 4분이나 5분 정도.

차가 우러나기까지는. 다른 일을 하기에는 좀 애매한 자투리 같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그냥 서 있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좀 이상하니까 주로 창밖을 바라봤어요. 해는 점점 늦게 뜨다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빨리 뜨기 시작하더군요. 겨울이 그렇게 지나갔네요. [김연수 소설가]

그때에도


                              - 신해욱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아비라는 이름의 새가 있습니다. 아비류는 5종이 있는데, 주로 북반구의 북부에서 번식합니다. 11월 하순이 되면 회색머리아비와 큰회색머리아비가 우리나라에 도착해서 겨울을 납니다. 유명한 아비 도래지는 경상남도 거제도 연안, 특히 해금강에서 구조라까지의 해안 해상. 아비류는 매우 잠수가 능하나 둔하기 때문에 쉽사리 희생되어 나날이 감소되는 종이랍니다. 이건 은유도, 상징도 아니고 그냥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 그대로입니다. 거제도 해상에서 아비들은 한데 모여서 월동합니다. 월동이라는 말, 참 좋지요? 월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 이상이 하는 것이죠. 따로 또 같이, 따뜻한 곳에서 한데 모여 혹독한 계절을 넘어가는 일, 그게 월동이지요.  [김연수 소설가]

         우주는 째깍거리고 별들은 톱니를 맞춘다
 

                                                                 - 서동욱

 

 

시계를 보려고 손목을 들었는데

시계 유리에 동그랗게 떠 있는 하늘

범선의 돛대처럼 초침은

저녁 구름 위를 천천히 떠가고

시계를 보려고 손목을 들었는데

시계는 간데없고

저무는 하늘의 풍경 주위로

반짝거리며 나타나

회전하는 수억 개의 톱니바퀴


째깍거리고―

째깍거리고―

젊은 인간이 애통해 울고, 이 슬픔을 기억해야지, 수없이 되뇌지만

기쁨도 슬픔도 사라지고 곧 울음의 기억도 잊어버려, 그를 울게 만

든 사람과 지금 방금 옷깃이 스친 줄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쳐 길을

건넌다 그 보행자가 길을 또 건너고 건너고 또 여러 번 울다가 점점

종이 위에 그린 멈춘 시계 같은 얼굴이 되어 그의 째깍거리는 소리

가 마침내 길 위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러고 나서 또


언젠가 멈출 시계 같은

다른 보행자들의 슬픔을 반짝이는 초침으로 밀고 가며 계속

우주는 째깍거리고

우주는 째깍거리고

시계들은 애통해 울고

별들은 톱니를 맞춘다

 


영화 '아바타'를 보는데, 살아가는 터전에서 쫓겨난 나비족이 나무 아래에 모여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제 입에서는 한숨이 나오더군요. 언제나 그런 식이었죠.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댈 곳은 질문으로만 이뤄진 기도뿐이죠. 도와주실거죠? 우릴 도와주실거죠? 이렇게 힘들고 고생했는데, 우린 잘 되겠죠? 하지만 거기 우리의 질문을 듣는 거대한 뭔가가 있다면, 그게 하느님이든 우주든 대지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어마어마한 존재가 있다면 대답해줄까요? 하지만 대답은 없어요. 어쩌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그 대답을 들을 순 없어요. 영화의 대사처럼 그저 균형을 잡을 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대답조차도. 진짜 질문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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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늘 환했다
 


                                             - 김용택

 

 
  매미가 운다.
  매미 소리에 내 마음을 준다.
 
  개망초 꽃이 피었다.
  꽃에게 내 마음을 준다.
 
  살구나무에 바람이 분다.
  바람에게 내 마음을 준다.
 
  날아가는 나비에게
  가만히 서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세상 처음이었던 내가 보인다.
  처음엔 늘 환했다.
 


 

 

 

 

 

 

 

 

계간 『문학들』 200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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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림


                                                         - 배용제

 


버드나무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르자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린다

일순 허공의 거대한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제 몸 깊숙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무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어쩌면 버드나무는 평생

사소한 바람 소리에도 아득히 정신을 놓으며

떠나간 새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속울음 같은 떨림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제 속을 비워갈 저 버드나무

자신의 영혼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날개 같은 것이어서


떨림이란 또 다른 너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없는 너를 품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


가슴속 오래 멈추지 않는 울림증,

어느 상한 마음이 머물다 떠나 간 흔적일까

또다시 허공 속 수만의 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바람 한 줌이 들여다보는 빈자리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림자만 버려져 있다


내 것이 아닌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길바닥에 우두커니 세워두지만

어느새 어두운 내 속으로 따라와 웅크린 채


버드나무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잎이 지거나 완전히 늙어버릴 때까지

서로의 떨림을 견주어본다

날 수 없는 날개를 품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막막함이라서

 

 

 

해남의 한 호수에 매년 수십만 마리씩 찾아오던 가창오리떼가 올해는 다섯 시간만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일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호수에 고기잡이를 허가하는 바람에 가창오리들에 놀라서 도망갔다는 분석도 있고, 먹이를 찾아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반론도 있더군요. 저는 가창오리도 아니니까 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창오리들이 다섯 시간만에 떠나간 뒤에는 호수 위 하늘도 오랫동안 떨었을 것 같네요. 겨울이면 가창오리떼들이 군무를 펼치던 하늘이거든요. 요즘 텅 빈 하늘이겠어요.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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