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천동 산 1302번지에 피는 꽃

 

                                                  엄하경

 

 

아버지의 집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골목은 구불텅 구불텅 뱀처럼 휘어졌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야 보이는 그 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대신 꽃을 키웠나 보다

등나무 줄기가 지붕을 감아나가고

철따라 꽃들은 내력도 없이 피었다 졌다

집에서 내려가는 길을 잃은 아버지 대신

가파른 골목길을 시지푸스처럼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그 꽃들의 이름, 한번도 호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꽃밭이 무성해질수록 집은 낡아갔고

우리는 사막처럼 건조해 졌다

그래서 아버지의 꽃이 될 순 없었나 보다

차례로 식구들은 집을 떠났고

꽃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여름 아침엔 나팔꽃이 아버지를 깨웠고

가을 저녁엔 꽃대 실한 국화가

홀로 술잔 기울이는 아버지를 지켰다

선거 때마다 나돌았던 공약으로

마침내 철거계고장이 날아든 봄날

아버지는 맨 먼저 꽃밭을 허물었다

닫아걸었던 내 기억의 문틈 사이로

동백 목련 사르비아 채송화 나팔꽃 줄장미 국화......

그제야 철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 열린 시학, 2009,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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