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지인 분들께..
영화 타이타닉 관련 지식/정보, 맛배기/주제곡 뮤비, 감상문 등입니다. 연구실 실회의 시간에 우리도 타이타닉 같은 명품 연구를 좀 해보자고 인용하다 보니 동영상까지 띄우게 되었네요. 혼자 보기 아까워서 보내드립니다.
Wikipedia는 들어 갈 때 마다 감동입니다. 그 풍부한 정보와 세련된 표현, 권위까지..(영어라서 읽기 어려운 문제 빼고는) 영양가 없는 댓글과 무례한 악플만 횡행하고 정작 정보/지식은 한정된 분량이 여기저기 똑같은 내용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우리나라 포털과는 큰 차이가 있네요. NAVER 동영상은 경고문 한번 나오는 데 무시하시면 됩니다.
첨부는 회사 사우지에 실었던 글의 원본인 데 현중 웹진에는 2000년 이후가 수록되어 있고 없어서 먼지 묻은 채 원본을 보냅니다. 10여 년 전에 써둔 글을 보니 쑥스럽네요. 그 때는 젊었었지요. 지금도 마음은 젊지만.. 왠지 내 글이지만 다시는 그렇게 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역시 나이와 감각의 문제인가요? 아래 한글 열 때 경고문 무시하고 열면 됩니다.
여러 지인 분들께 평소의 호의와 관심에 답하는 차원에서 보내드리오니 귀찮더래도 반갑게 보아주셨으면..
늦었지만 새해 인사 겸해서 드리며 항상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길 빕니다.
2009. 2. 11. 이수목 배상
요번 감기가 장난이 아니네 !!
이제까지 겨울에 감기 한번 안했는데,
양약이라고는 먹지 않던 내가 근 2주동안이나 약봉지를 달고 다녔으니,
나루형님 말대로 세월과 나이가 들었슴인가 ?
나도 타이타닉 주제곡을 부를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내가 노래를 쪼깐한다고 술만 들이키면 자꾸 신청을 해대니,나 원참...
어서 빨리 목을 좀 가다듬어 제위들 앞에서도 옛날처름 재롱을 떨어야 하겠는데 ㅎㅎㅎ
워낙 술과 노래 그리고 ㅇㅈ를 좋아하는터라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볼려고 노력 하고 있답니다.
나이들어 이보다 좋은 취미가 또 어디 있겠나 ?
지역은 울산이었으면 좋으련만,내가 있는곳이 창원이라
낮엔 일하고, 밤은 풍류로 보낸다면 신선인들 부러울소냐 ?
나루형님 오시고, 언제한번 창원으로 초청할테니 들 오세요.
그때까지 보칼시스템, 장소 및 기쁨조도 함께 확보하고 있을테니
기대하시라 !
斗星 으로부터
이보시게.
그래서 내 옛적에 두성더러 ‘돌팔이’라고 안 그랬어?
어찌 기를 다스리는 양반이 감기 -그게 장난도 아닌- 에 꼼짝을 못하더란 말인가?
옛날 생각 나누만. 어쩌라고? 소주에 고추 가루 한 숟가락을 타서 마시면 ‘확 열이 나고 감기가 떨어져?’
하긴 나도 곰은 곰이었지, 아니면 너무 답답했거나…
어떠신가 그 처방은, 사실 매울 것 같지만 그게 맵지가 않아. 외려 쓴 맛이 나더라고, 그러니 먹을 만 했었어.
세월이 가면 나이라는 건 따라 느는 숫잔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이유로 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늙기 시작 하는 걸세.
하긴 뭐 요즘 어린애들도 걸핏하면 ‘옛날에’ 운운 한다더라만,
생각을 해 보시게, 7살 먹은 아이의 옛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네.
뭔 일을 도모하려고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이’란 장벽이 만만치가 않아.
돌이켜보면 그게 비단 요즘의 일도 아니니, 그게 더 문제가 아닌가?
결국 한 생(지금까지) 살면서, 이리 저리 핑계거리를 만들면서 살았던 게야.
아주 그럴싸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을 들이대면서 욕망이랄까? 무모함이랄까?
그런 것들을 일견 다스려왔던 거지.
바꾸어 먹은 세월이 있어서 그리 후회할 일도 아니긴 한데도,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쉬 떨치기가 점점 힘들어짐일세.
그 와중에 그래도 아직 젊게 사는 두성 같은 사람이 있어 위로가 되네.
목을 가다듬고 재롱을 떨어보겠다?
거참 재롱이란 단어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네.
하긴 그랬어. 대 소 모임을 주도하면서, 한 마디씩 던지곤 의미를 부여하고,
마이크 잡으면 열창으로 앵콜을 받는 일이 그리 쉬운 일만도 아니지.
함께 한 이들에게 부담 없는 즐거움을 주었으니 재롱은 재롱일세.
ㅇ ㅈ 을 좋아한다니? 평소 ‘안주’빨이 센 편이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울산이고 창원이고 허락하는 곳에서 한번 봅시다.
그것도 그리움인걸,
아니하면 또 평생에 후회가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여긴 오후 7시 10분. 공정회의 들어가네.
한국 시는 벌써 새벽 3시가 훌쩍 넘었으니, 지금쯤 좋아하는 ㅇ ㅈ을 탐하고 있을라나?
' 돌팔이 '가 맞지 !
자격증이 없으니 당연히 돌팔이지.
그러나, 나루형님의 기억으론 내가 돌팔이가 아닐껄 ?
기억나는가 모르겠네 ?
내가 구들장 식당할 때, 나와 같이 월.화.수 내리 연장으로 술 먹고,
나루가 목요일은 도저히 안되겠다 했을 때, 내가 나루의 배를 눌려 주었지 ?
30분인가 있다가 한잔 가능하다 해서 시작해서 아마 새벽 2시까지 맥주 한박스 먹었을껄 ?
나이란 장벽이 만만찮은건 알아, 그리고 맞아 !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아쉬움의 후회도 이해해,
그렇게도 진취적이고 긍정적이었던 나루의 사고가 다 늙어 버렸어 아쉬운 생각이 나네 !
회사의 틀 안에 있으니 후배들이 올라오고, 나는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희망도 없고,
격세지감도 들고, 나이, 고참 운운하며 마치 다 살았냥 이리저리 핑계를 대지 ?
자 !
이 대목에서 난 이렇게 생각 한다네,
사고를 한번 뒤집어 봄세,
난, 현대 라는 연수원에서 25년 내지 30년 훈련을 받고,남다른 경험을 쌓았다 !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 자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70까지로 볼 때,
앞으로 15년 내지 20년이란 세월이 남았지 않는가 !
이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람차고 젊게 보낼껀가 ?
불가에선 이승의 일생을 찰나, 순간,으로 보지요.
1초도, 100년도 찰나인 것을 우리 인간은 모르는 거지요.
즉, 1초와 100년은 같다,
즉, 生과 死가 같다, 하나다 (生死如一)
마음 한번 잘 먹으니 극락이 예 있구나 (心卽是佛)
어제 보름 때 화왕산 억세풀 태우기 행사 때 보세요.
액운을 털고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일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 인간일진데,
뭐에 그래 나이를 먹었다, 늙었다 하느냐 말이야 ?
나처럼 항상 20대 청춘,
이제 학교 막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 디디었을 때처럼 생각하세요.
그래야 부끄럼 없이 앞에 나가 당당히 노랠 부를 수 있고, 재롱도 부릴 수 있고,
ㅇㅈ를 탐하는 게 아니라,서로를 느낄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 해 봅네다 !
우리 생육신 여러분들 !
우리는 아직 젊슴니데이 ~
50~55 까지고는 요즘 명함도 못 넵니데이 ~
80년데 초반의 초심으로,
우리 모두 젊고 활기차게 한잔 합시다 !!!!
I am still hungry and young - 斗星 –
고인이 되었지만 70년대 저음으로 목소리 멋있게 깔던 하수형(영?)이란 가수가 있었지요.
그 사람이 부른 노래 중에 ‘길’인가? 하는 제목의 노래가 있어요.
저 넒은 바다 위에 돛단배 하나 두둥실 떠간다
이 넒은 세상에 외로운 내가 터벅 터벅 걸어간다.
때로는 외로움에 울기도 하고,
잠깐씩 스쳐가는 기쁨 속에, 서러운 기억일랑 날려보내고
너털 웃음 웃고 간다.
대충 이런 류의 가산데,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한 노래로 알고 있고…
모자란 생각이지만 난 인생이란 게 태어날 때 운명의 실타래 한 쪽 끝을 꼭 쥐고 태어났다고 생각을 해요.
먼저 깨달은 고독한 사람들이 있어, 후대에 인생의 큰 가르침을 주는 것 같지만,
그들 역시 내가 쥐고 태어난 한쪽 끝의 실타래가 놓여있는 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얘깁니다.
불가에서는 인생을 왜 ‘苦海’라고 했을까요?
또 종교의 힘을 빌어 그 바다를 좀 평안의 바다, 평화의 바다, 행복이 넘실거리는 바다를 만들 수도 있었으련만,
기실 그런 성공을 보지 못한거죠.
맡기고 살면서, 겁의 세월을 빌고 또 빌고… 그러는 가운데 마음 한 가운데 와 닿는 깨달음.
이른바 解脫이니 彼岸의 언덕이니 涅槃이니 하는 말들의 속성을 들여다보면 다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런 단어들의 영어 단어를 찾다 보면 ‘Nirvana’라고 되어있지요?
저 끝에 쯤 가다 보면 이 단어를 ‘꿈’이라고 풀이하고 있어요. 결국 우리가 구도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곳은 실상의 어떤 형태로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바라는 모습에 다름이 아닌 겁니다.
그런 현상을 깨닫고 보니까 한 생 살면서 이리 저리 고민한 들 그 고민으로 도달할 곳이 없음을 깨닫고, 갈무리의 큰 덩이를 평소 느꼈던 의문의 못다 푼 해로 끌어안고 갈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 인거죠.
그래서 선사들의 선문답을 들으면서 이 뭔 소린고? 하는 것도 ‘해석은 네 마음이다.’ 라는 것 아니겠나요?
어느 스님은 “이 뭐꼬?”를 화두로 삼고 도를 닦았잖아요?
한 길을 돌아 도달한 길이 한 도를 트는 길 인줄 알았더니 어제랑 같고, 다시 부지런히 갈고 또 닦고 바라보니 또 그 길이고,
돌고 돌아 내려오는 길은 한계령 고갯길 같이 구불구불 끝이 안 보였겠죠.
그러니 “이 뭐꼬?”를 품고 살 수밖에요…
다시 운명론으로 가 볼까요?
우리 운명의 끝은 가늘고 긴 명주실 타래의 한 끝에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태어날 때 왼 손이든 오른 손이든 이 실타래의 실 풀린 한 가닥을 꼭 쥐고 태어나는 겁니다.
어떤 이는 길고 평탄하게 실타래가 풀린 줄을 잡고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당최 어찌 풀고 돌아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실 타래의 끝을 붙잡고 태어나기도 하지요.
당초 잘 풀린 실타래를 잡고 태어난 사람은 인생 편하게 곧장 걸어가다 보면, 끝에 당도해요.
그런가 하면 돌고 돌고 어지럼증 나게 돌아도 끝이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운명이지요.
‘운명을 개척’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일견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리 저리 굽고 돌아가야 할 길을 힘을 들여 당겨냄으로 해서 가는 길을 곧게 했을 뿐, 타래의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지난 번 메일의 내용 또한 나를 포함해서 열심히 그야 말로 열심히 살아 오던 어느 날,
뒤돌아 보니 내 걸어온 자취는 운명의 저 끝의 거대한 실타래로부터 풀려 나온 방향을 따라 그저 걸어오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게 된 뒤 늦은 자각인 것뿐입니다.
부분 부분 구부러진 실을 풀려는 시도는 했었음에도 번번히 실패한 자국들이 보이고, 그때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위를 달고 자기를 합리화 했었더란 말이지요.
문득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싶은 순간. 이 세상에 주어진 나 스스로의 내용연수가 거의 끝날 즈음이 되었더란 것.
그게 마음 개운치 않은 오늘 인겁니다. 더구나 주변의 야릇한 기류로 인해 바라보게 된 내 실상이 그렇다고 느끼는 순간 허탈이랄까? 허망이랄까? 그런 감정이 들더라는 얘기죠.
이쯤하고 보니까 돌팔이의 정의는 면허의 유무, 자격의 유무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은 혹시 안 드시나?
영향을 미치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데 영향을 주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곧 돌팔이의 정의라는 생각은 혹 안 드시나?
근데 그거 묘하게 최면효과가 있네, 돌팔이, 돌팔이, 돌팔이, 돌팔이, 돌팔이, 돌팔이 … 이거 대단히 정겹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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