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광명시에 편입된 고모 집은 '흑연광산' 이라고 국민학교 사회책에도 소개되고 있는 오류광산이 있는 곳이었다.
몇번 행정 구역이 오가던 끝에 지금은 광명시로 편입된 이 곳의 당시 주소는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였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오류동 남방 4킬로키미터 쯤 되는 곳인데, 군 부대의 영향인 듯... 발전이 아주 더딘 곳이었다.
당시 경기화학이라는 비료공장과 오류광산의 도가니 공장을 제외하곤 농업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런 마을이었다.
동네 이름은 식골이라고도 했고, 식곡이라고도 했다.
도당나무라고 불리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집단 서식하고 있는 도당고개를 경계로 부천군과 시흥군이 갈려 있었고,
그 고개 마루에 중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독교 재단으로 처음엔 '의화고등공민학교'로 개교를 했다가 나중 '성택중학교'로
개명을 하게되고... 현재는 성택조리과학고? 로 특수 고등학교로 바뀌었는데, 중학교 과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성택중학교와 귀한 인연이 닿아 난 정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복을 누린다.
당장 고모집으로 오긴 왔지만 나의 진학을 위한 세부 계획을 누나는 갖고 있질 못했고, 나 역시 별 대책이 없었다.
아마 당시 누나는 일단 거취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놓고, 기회를 보자고 생각을 했었던 모양이다.
다행스럽게, 고모 집 동네엔 이발소가 하나 있었고, 나 처럼 면도도 할 줄 알고 머리도 감겨주면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 손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그 이발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늦은 가을부터 한 겨울을 고모집에서 기거하면서 이른바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서울의 일당에 비해서는 다소 못한 처우였지만, 하루 400원 정도의 일당...?
한 3개월이 지났을까?
진행과정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데, 오류동 덕고개 옆에 '오류고등공민학교'에 입학허가를 받게되었다.
이발소 주인아저씨의 양해로 오후 4시까지만 일하고 일당은 250원만 받는 조건이었다.
일당 조정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만으로 모든 것이 행복한 조건들이 되었다.
'검정고시'도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것은 국민학교 5학년 10월까지 학력이 전분데, 중학교 과정을 잘 따라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학교환경은 아주 열악 그 자체였지만 거기서 만난 아이들은 이른바 '공부 고픈 아이들' 이었던 만큼,
밤이 즐거웠다. 학교 재정여건상 매월 수업료를 내야했고, 한 달에 한번 장학생을 뽑아 전액 반액 장학생을 정해주는 제도는
내겐 큰 도전감을 주었고, 즐거운 경쟁을 즐길 수 있었다. 수업료가 1,500원 이었던가?
낯 설게 빡빡 깍은 머리가 자랑스러웠던 적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 학교에서 난 특이하게 생긴 짱구머리로 인해 '서산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10월말까지 이어진 나의 내 기억 속에 결코 초라하지 않은 자랑스런 학창 생활의 기억이다.
문점숙선생님, 박광수선생님 그리고 국어를 가르치셨던 고운 선생님이 계셨다.
아마 미술을 전공하셨는데 국어도 가르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내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힘을 주셨던 분...
거기서 난 문선생님이 지도하는 합창부에서 노래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광수법칙1호, 2호 하면서 결합법칙과 배분법칙을 쉽게 가르치셨던 박선생님과 비율때문에 눈물지었던 아픈 기억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국어 겸 미술 선생님과 야외 그림수업을 통해 '진짜 학생인갑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몇 몇 생각나는 친구들과의 고운 추억도 흑백사진으로 잘 보관되어있는 '오류고등공민학교'의 추억은 정말 추억이다.
이젠 그 자리에 학교도 없고, 이젠 그 학교의 이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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