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느 단체에 소속되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한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다. 그것이 일단 내가 소속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발소라는 조직의 계통은 이렇다.
제일 높은 분이 이른바 사장이고, 머리 깍는 일로는 대가다.
사장님이라고 따로 호칭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아저씨.
그리곤 차석 이발산데 그분도 그냥 '아저씨'다.
그 다음은 이발소 규모에 따라 다른데 면도사가 있다.
보통은 여자 면도사를 고용했었다. 상황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긴 했다.
젤 아래급이 직위를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는 꼬마다.
물 탱크에 물 채우기, 수건빨기, 청소하기 등 모든 잔 일들이 이 꼬마의 몫이다.
당시 청량리 골목 이발소는 규모가 크지 않고, 이발비도 비교적 싼 허름한 이발소였다.
해서 사장 아저씨가 한분, 사장님 동생이 차석, 그 다음이 꼬마였다.
나로인해 사장아저씨 동생은 한 계급 진급한 꼴이었는데, 실력은 내가 보기 부럽게도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깍아주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머리 다듬기(그땐 '시야기'라고 일본말을 썼다)는 사장님 몫이었다.
거기선 키울 꿈이 대단히 단순했다.
'빨리 이발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
모든 계획은 그 다음 수순으로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이발 기술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잘 감기다 보면, 좀 쉬운 상대로 면도를 시켜본다.
쉬울 것 같지만 이거 손 떨리는 일이다. 얼굴에 면도칼을 대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어쨋든 그 동네서 몇 달 일하다보니 "꼬마가 머리 시원하게 감기네."란 칭찬도 들었고,
인심 좋은 아저씨한테선 가끔 50원 정도의 팁도 받았다.
적지 않은 돈인 것은 당시 내 일당이 200원 정도였으니까... 밥 한끼 몫이다.
손 재주가 좋은 탓일지?
하여간 몇 개월 만에 면도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
물론 고급 손님에겐 아직 칼을 못대지만...
이젠 면도칼 정도는 갈아내야하는 수준, 그런데 그건 장래를 위해서는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일 측면에서야 권장사항이 아닌 것이 일이 늘어난 것이다.
머리를 다 깍으면 그 다음은 내가 들어가서 면도하고, 머리 감기고, 말리고 하는 공정이 종전대비 추가가 된 것이다.
시급? 물론 인상 없었고...
그런 세월이 지나다보니 그것도 일이라고 다른 업소를 추천해 주거나 픽업해 가는 일도 생겼다.
무려 일당 50원 인상 조건으로 용두동의 다른 이발소로 옮기게 되었다.
용두동 개천 옆의 뭔 고철상 같은 공터 옆의 무허가 이발소였다. 인원구성은 비슷했고,
일도 같은 일이었고, 다만 전에 있었던 곳 보다 한 가지 편한 것은 여긴 수조에 수도꼭지가 달려서
따로 공동수도에 가서 물을 길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엄청스러운 혜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곳 생활도 내 꿈의 실현과는 점점 거리가 있어보였고,
매일 번 돈을 세어 본들 큰 돈으로 늘어날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해서 다시 한번 옮겨 볼 결심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시내 방면이 수입이 좋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었다.
해서 여기서 불과 몇 정류장 떨어진 신설동으로 가기로 했다. 일당은 여기서 다시 50원 인상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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