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눈물과 삶의 눈물
1996. 11. 14
“엄마 내 없어도 잘 살아라, 내가 없으면 돈도 안 나가고 좋지...”
“엄마 열심히 살아서 부자가 되길 바래, 나 대신 누나하고 형한테 잘 해주라. 마지막 부탁 이다.”
열두 살 난 초등학교 6학년생이 너무도 가난한 자기 집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목을 매어 자살하기 전에 공책 한 장에다 썼다고 하는 유서 내용이다.
유서에는 또 하늘나라에 먼저 가 있을 아버지 곁에다 묻어달라는 말을 썼다한다. 그리고 땅 속에 묻히면 너무 외로울 것 같고, 엄마도 누나도 형도 보고싶을 테니 일주일에 한번씩만 찾아와 달라는 말도 썼다고 하고...
그러면서 자기의 유품인 몇 푼 안 되는 돈과 소지품은 형이 모두 갖도록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난의 상처’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진 이 기사는 찌든 가난이 끝내 불러간 어린 생명에 대한 가슴 답답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강민숙이란 생소한 이름의 시인은 ‘하나님 당신은 나의 누구입니까?’ 라는 탄식으로 끝나는 그의 시를 통해 교통사고로 즉사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시로 썼다.
참 사랑을 줄 것 같던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안겨준 것은 대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자 함이냐? 하는 질문으로 처절한 여인네의 슬픔을 읇고 있다.
‘동사무소에서’ 라는 詩를 통해 그녀는 이렇게 비게 된 남편의 자리를 표현했다.
오늘은
동사무소에서 지환이 출생신고를 하면서
당신 사망신고를 같이 냈습니다.
“신고는 우리 그이가 한 것으로 해 주세요.”
대기실 의자에 앉아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는데
당신의 이름을 지운
빨간 가위표가
내 심장에 꽂혀듭니다.
두 가지 실화가 각기 주는 의미가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같다. 그런데 그 슬픔의 느낌은 각각 다르다. 그것은 죽음과 삶의 결과에서 오는 차이에 기인한다. 전자의 어린 죽음이 주는 슬픔은 한계에 도달한 절망의 슬픔이요, 후자의 경우는 절망 중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는 느낌에 공감을 하면서 눈물 머금은 채 두 손 꼭 잡아주며 ‘열심히 살아가야 됩니다. 절망만 하지 말구요.’ 라며 힘을 북돋워주고 싶은 슬픔의 종류인 것이다.
열두 살 난 소년의 죽음은 나름대로의 죽음으로 절망을 단절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철없는 선택이었는가 하는 면에서 오히려 단절된 슬픔의 통곡으로 끝나버릴 서글픔이다. 그러나 이제 막 새로운 시작을 위해 죽음을 신고하면서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그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으나 가야하는 새 삶의 모습을 보게되고 그것이 안타까워 눈물겹게 만드는 것이다.
포기해서는 안 될 삶의 모습을 두 개의 사실은 그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슬픔의 의미가 모두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 느낌상 중간 본문은 생략했습니다.
'글모음 > 경영혁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줏대 (0) | 2014.03.26 |
---|---|
힘센 화살도 거리가 멀면... (0) | 2014.03.26 |
정말 아름답다는 것 (0) | 2014.03.26 |
NATO (0) | 2014.03.26 |
지나친 생각 (0) | 2014.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