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숙을 전전하는 것도 하루 하루 현금을 필요로 한 일이어서,

그 생활 조차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던 듯, 어딘가로 옮겨 간 곳은 인천에서 살적 오동나무 배밭이 내려다 보이던 언덕의 풍경과 많이 닮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개천이라기엔 굉장히 큰 천을 넘어 뚝방에 즐비하게 늘어서 허름한 움막들이 겨우 비나 가릴 정도로 모여 있던곳. 나중 알고보니 그 지역의 지명이 중량교라고 했습니다.

중량천을 넘는 다리는 차량이동을 위한 다리가 하나, 그리고 가끔 지나다니는 기차를 위한 다리가 하나 마을에서는 두 다리가 형제처럼 나란하게 놓여있는듯이 보이는 풍경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양도 다른 동네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비가 내린 중량천엔 벌건 물이 일시에 흐르곤 했는데, 그 물에 멱을 감으면서 노는 아이들을 말리는 어른들이 없었다는 것이 다른 동네완 좀 달랐을까?

나름 그런 놀이는 스릴있는 즐거움이었고, 누가 더 사내 다운가를 겨루는 호승심을 자극하는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큰 물이 날때면 가끔 돼지도 떠 내려오는 곳이었으니 참 위험천만한 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벌건 물이 흐르는 천을 왕복해주어야 사내들 무리에 들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차가 다니는 다리 언저리에서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면 빠른 물살에 흐르면서 차량이동을 위한 다리까지 한 500미터는 밀려 내려간 지점에서 겨우 반대편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거리를 걸어 올라가서 개울을 건너기 시작해야 처음 개울을 건넜던 장소까지 헤엄처 갈 수 있었지요.

아마 요즘 보면 그 폭이 그닥 넓지 않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그땐 개 헤엄으로 턱이 숨에 차도록 물살을 헤어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긴 거리였습니다.

 

이 동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곳과는 거리가 먼 듯 했습니다.

우리가 살던 움집은 그나마 주인이 있던 곳으로 그 움에 얹혀 살았는데, 동갑내기 해식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움집은 그 친구네 소유였지요.

그 친구의 엄마나 아버지는 같이 있었던 기억은 없는데, 아마 있었겠지요.

우리도 엄마랑 아버지가 같이 있었으니까...

 

학교랑 거리가 먼 아이들은 식구들의 먹을 거리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구해와야 했습니다.

우리 형제도 그 동에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는 무리에 자연스럽게 얽혔던 것 같은데 주로 하는 일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팔고...

중량교(다리)를 청량리 방면으로 막 건너면 그 자리에 '칠성당' 아이스케키를 보급하는 보급소가 있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멜통을 하나씩 받아서 이름을 적고 'xx개' 라고 수불 대장에 기록을 하고는 각자 자기가 팔수 있는 곳으로 흩어져갔습니다.

큰 아이들은 30~50개 정도씩을 소화하는 모양이었는데, 당시 내 또래의 아이들 특히 나 같은 초짜는 한 차수에 15개 정도를 소화하기도 어려웠지요. 왜냐하면 녹기전에 다 팔지 않으면 고스란히 내가 변상해야 하는 위험한 거래가 되기때문입니다.

형과 내가 벌수 있는 돈이래야 당시 15원에서 30원 사이...

 

동네 국수집에서 마른 국수 한 근이 15원 할 때니까, 두 형제의 수입으로 우리 식구가 그저 신 김치에 풀어 넣은 국수로 하루를 요기할 수 있는 정도의 생활은 가능했습니다.

 

여름이 지나면 마대를 울러메고 고물도 주워 팔고, 팔에 힘이 좀 있으면 동네 도넛가게에서 찹쌀 도넛을 받아다 팔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닐 우산도 팔고...

그러고 보면 당시 중량교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살기에는 서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 사는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 

멀리 한독약품 상징마크가 보이는 제약회사가 있었고, 중량천을 건너 면목동 방면으로 진행하는 도로 옆에는 신성일씨 소유의 극장이라고 하는 뭔 극장이 있었고...

 

당시 아버진 엉치 부근에 심한 종기로 고생을 했는데, 신문지를 돌돌 말아 접시위에 올려서 태운 후 모인 신문기름을 환부에 바르는 어처구니 없는 치료를 했었는데, 완쾌여부는 또 알길이 없네요.

 

그때 형은 '불나비 사랑'이란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아버지 애창곡 중에 하나였지요.

가련다 떠나련다~ 라는 유정천린가요 하는 노래와 함께 말이지요.

 

기억이라는 것은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것이라서 중량교의 생활을 어찌 접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운천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건 어른들의 결정 몫이었을테니까요.

 

중량교의 생활은 아마 1년을 채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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