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은 운명도 개척하고 척박한 환경도 다 극복하면서 떡잎부터 파랗게 가능성을 보이면서 성장을 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환경은 인성이나 생활 자체를 지배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인천을 떠나 2년여..., 자랑스런 전학증은 내 꾸러미중 보물같은 책가방 한구석에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기간 학교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일이 너무 안타까워서 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는 건데, 글쎄다.
그때도 국민학교가 의무교육과정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긴하다.
재학중 여러차례 집으로 돌려보내진 적이 있었던 기억때문이다.
참 기가막히게도 학교와 인연이 엮인다.
우연하게 아버지 고향동네 아저씨 아들이 여기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일로 내 전학문제는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전학증의 기록이 3학년 1학기 ... 그러니 내 나이를 찾아 가려면 5학년이 되어야 하는데, 학업 중단의 기간이 너무 긴 탓에 3학년으로 전학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었을뿐 다른 조건은 없었는데.
다른 아이들에 비해 큰 덩치가 나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전학생을 소개하는 담임선생님의 영향으로 얻게된 '글짓기 왕'이라는 별호.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처음 글짓기 대회를 나갔을 때 글짓기가 뭔지를 몰라 같이 대회에 나간 친구랑 고민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글짓기를 따로 배워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시 부여된 글짓기 제목은 '심부름'. 공교롭게도 도덕인가 하는 과목에 심부름이라는 글이 있었다. 둘이는 고민을 했다. 그걸 어찌 다 외워서 쓰는가 말이다.
결국 둘은 "영희야." "예?" 어머니가 부르셨습니다. 까지만 써 놓고는 긴 시간 눈만 껌벅이다가 나왔다.
나중 학교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비로소 교과목 중에 글짓기 시간이 주어졌다.
'모자'란 제목으로 '특선'을 했고, 공책과 연필을 듬뿍 받았다. 그 이후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 행사가 많아졌었던 기억이고, 그때마다 상을 탔었다. 그 이유로 생활 기록부(통신표)엔 '글짓기를 잘함' 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전학 온 학교에서의 첫 글짓기 '봄'
난 노란털난 병아리와 운동장 구석에 돋아나는 파란 싹을 주제로 7, 5조 운율의 시를 지었다.
파릇 파릇 새싹이 돋아 나오고,
병아리 삐약 삐약 엄마 찾는다.
.
.
선생님이 극찬을 하셨다.
사실이야 칭찬받을일도 아니었을 것은,
5학년이 쓴 3학년 시가 아닌가?
형이 숙제 해 준것이나 같았지.
아무튼 그 인연으로 아버지 고향 친구분 아드님이신 이상용선생님으로 부터 글짓기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다. 매일 주제를 정해 한 작품씩 써서 선생님 댁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아마 학교에서 특별지도를 하는 것이마음에 걸리셨던 모양?
별 다른 지도 의견 같은 것은 없었지만 하여간 부지런히 글제를 잡고 시를 썼다.
생각해보면 아 옛날이여~
201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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