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경향신문 기고 글 한편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고하신 분은 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사학자 신정일로 되어 있습니다. 저로서야 처음 대하는 인물이고요.

 

<인용>

 

중종 때 사람이 임형수(林亨秀)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본관은 평택이다.

을사년에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뒤에 사직 당하고 정미년에 사사(賜死)되었다. 이유는 윤원형 형제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임형수는 뜻이 높고 기개가 한 세상을 덮을 만했으며, 문무의 재능도 지녔다고 한다. 일찍이 이황과 함께 호담(豪談)에 들어갔는데, 술에 취하면 곧

호탕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를 지었다. 한번은 이황의 자를 부르면서 “자네는 사나이의 장쾌한 취미를 아는가, 나는 아네.” 라고 하자. 이황이 웃으며

“한번 말해 보게.” 했다. 임형수가 대답했다.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갑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가면, 긴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곧 활을 힘껏 잡아 당기어 쏘아 죽여 말에서 내려 칼을 빼서 이 놈을 잡고, 고목을 베어 불을 피우고, 기다란 꼬챙이에다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지는데, 걸상에 걸터앉아 저며서 먹으며 큰 은 대접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고, 얼큰하게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를 비단처럼 펄펄 스치게 된다. 이런 멋을 자네가 아는가. 자네가 잘하는 것은 다만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

뿐이야.”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황은 임형수의 인품을 말할 때면, 늘 그가 하던 말을 되뇌었다.

“그래, 내가 잘하는 것은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뿐일세.

 

나주에서 사약을 먹기 전에 임형수는 열 살도 안된 아들을 불러 당부했다. “글을 배우지 말라.” 해 놓고는 그 말이 걸렸던지 아들을 다시 불러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는 보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배운 바를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권력에 아부해 출세나 지향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현실에 자식이 따라갈까 염려한 것이다.

 

그는 간사한 자를 배척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그로 인해 화를 당하고 만다.

그의 강직함을 시기한 윤원형과 정언각 일파에 의해 죽음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는 독배를 받아 놓고서도 크게 웃으며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고 한다.

 

옛 사람들의 신산했던 삶을 들여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면서 먹먹할 때가 많고, 한편으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내가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자꾸 의문점만 남는 세상에 “자네가 잘하는 것은 다만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뿐이야.” 란 임형수의 말이 문득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간다.

 

<신정일/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사학자>

 

이 글을 옮겨 적으면서 저도 문득 “죽은 글을 쓰고 있지요.” 라고 한 잔 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툭 뱉어내던 현직 변호사 후배가 던진 말이 생각납니다.

분명 글자를 다루는 재주의 다른 표현임에도 말이지요. 그 후배는 시를 쓰고 싶어했던 문학소년이었다고 하네요.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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