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日對酒

                                                          

                                            茶山 丁若鏞

 

后王有土田(후왕유토전) 임금이 땅 가지고 있는 것이

譬如富家翁(비여부가옹) 말하자면 부잣집 영감 같은 것

翁有田百頃(옹유전백경) 영감 밭이 일백 두락이고

十男各異宮(십남각이궁) 아들 열이 제각기 따로 산다면

應須家十頃(응수가십경) 당연히 한 집에 열 두락씩 주어

飢飽使之同(기포사지동) 먹고 사는 형편을 같이 해야지

黠男呑八九(힐남탄팔구) 약은 자식이 팔구십 두락 삼켜버리면

痴男庫常空(치남고상공) 못난 자식 곳간 늘 비기 마련이고

黠男粲錦服(힐남찬금복) 약은 자식 비단 옷 찬란할 때

痴男苦尫癃(치남고왕륭) 못난 자식은 병약에 시달리겠지.

 

翁眼苟一盻(옹안구일혜) 영감이 눈으로 그 광경을 보면

惻怛酸其衷(측달산기충) 불쌍하고 속이 쓰리겠지만

任之不整理(임지불정리) 맡겨버리고 직접 정리를 하지 않았기에

宛轉流西東(완전유서동) 서쪽 동쪽 제 멋대로 돼버린 게지

骨肉均所受(골육균소수) 똑 같이 받은 뼈와 살인데

慈惠何不公(자혜하불공) 사랑이 왜 불공정한가

大綱旣隳圮(대강기휴비) 근본 강령이 무너져 버렸기에

萬事窒不通(만사질불통) 만사가 따라서 꽉 막혀 버린거지

中夜拍案起(중야박안기) 한 밤중에 책상을 치고 일어나

歎息瞻高穹(탄식첨고궁) 탄식하며 높은 하늘을 본다네.

 

1, 2연에서 느낌이 좀 오시나요?

관료대신들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는 정치 행태에 대한 강한 분노를 넌지시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실 우리 나라 정치사를 통틀어 강력한 왕권이 행사 된 적이 없었다고도 하네요.

언젠가 와은이 한번 말했었나요?

 

고려조 왕건? 강하진 못했어요. 여러 지역에 분포된 토후들 적당히 눈치 보면서 간간히 전쟁을 일으켜서 통제 아닌 통제권하에 그들을 두었던 거지요.

 

조선조는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왕좌에 앉아있던 영조요? 초기 탕평책 운운하면서 토지개혁이니 관료의 등용에 대해 문호를 널리 열었던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실정을 하게 됩니다. 밀려서지요.

선조의 나약함을 본 후 엄청난 총기로 왕좌에 앉은 광해군은 그의 제대로 된 정치의지를 채 펴지도 못하고 반정으로 물러 나지요?

고구려요? 광개토태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막강했을라나요?

그 이도 전쟁에 전쟁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전쟁을 통한 내치가 통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과거 3000년 이상을 대 중국과 영토 전쟁을 펼쳤던 막강했던 반도의 역사는 공명을 주장하는 문신에 의해 주도되는 명분과 공리공론으로 전쟁을 자초하게 되었고,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고 역사에서 배우는 경영과 리더십의 저자 강기준 선생은 지적합니다.

 

정조조의 조선 형국은 어땠습니까?

정조 독살설까지 있을 정도로 왕권이 초라했던 시절이었지요.

훌륭한 임금이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니 임금의 뜻과 다른 방향에서 정치는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고, 이를 보고도 바로잡지 못하는 임금이 심경이 위 시에서 늙은이로 표현되고 있는 것 아니겠나요?

그러니 한 밤중에 책상을 치고 일어나 탄식하며 높은 하늘을 바라본거지요. 다산 선생은…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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