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도 개인적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고쳐 부르는 것에 크게 찬성하질 않습니다. 아직 어색하기도 하고요. 아마 일본식 표현이기 때문에... 가 주 된 사유인 것으로 아는데, 실제 일본의 학제가 어떤지는 모르겠네요만, 이른바 왜정땐 보통학교라고 불리지 않았던가요?

 

할머니가 돌아 가신후 이사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우리가 이사를 간 곳은 오동배밭이라고 불리는 과수원 집이었고요. 아버지도 잠시간 함께 그 곳에서 사셨습니다.

과수원집의 일과는 주로 풀 뽑고, 꽃 따주고, 열매 맺은 후 봉지 싸주고..., 등등의 일이었는데,

당시 어린 마음에도 소출이 영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일삼아 따 놓은 배를 봐도 상품성이 형편없던 그런 품종의 배가 아니었나 합니다. 양도 질도 다 떨어지는...

 

나중 알게되었지만 과수원집은 누군가 과수원을 포기하고 잠시 비워두었던 집인데, 우리 사정을 고려해서 잠시간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던 집이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도로를 경계로 조금 높은 위치에 종혜누나 집이 있었지요. 커다란 개를 키우는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누나 또래의 종숙이 누나가 있었고, 그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종성이 형도 있었고...,

그 위로 또 큰 형이 하나 있었는데, 마당에 깔아 놓은 평상에서 장기를 가르쳐 준 친절한 형들이었습니다. 종혜누나랑 형은 같은 학년이라서 꽤 친하게 지냈었지요.

 

과수원 서쪽 비탈엔 큰 감나무가 서 너 그루 있었고, 그 옆엔 오동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는데, 아마 이 오동나무가 과수원의 상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비탈위로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동쪽을 향해 나름 흙벽돌로 대충 바람을 가린 집들이 대 여섯채 있었고, 친구라고 하기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박성일이란 동급아이가 살았었지요. 가끔 들러서 같이 학교에 가기도 했고 나보단 공부를 더 잘했었습니다.

우리 누난 전교에서 알아주는 수재였습니다. 그야말로 한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그 집에서 국민학교 취학 통지서를 받고는 먼 길을 걸어 다니는 학창 시절이 시작됩니다. 이제 추억만 남은..., 석남 국민학교였지요.

신발 주머니에 잔 자갈들을 담아 100걸음당 하나씩 돌을 놓고 오면서 긴 하교길의 무료를 달래기도 했었습니다.

 

다시 사업을 찾아 아버진 어디론가 가시고, 여름과 겨울을 게서 한 두번 나는 동안 엄마는 두번째 겨울에 심한 체증으로 앓아 누웠습니다. 거친 수수로 만들어 먹은 저녁이 잘 못된것 같다고 시작된 엄마의 체증은 끝까지 낫지를 않는 체증이었습니다. 끝내는 얼굴도 붓고 다리까지 퉁퉁 부어오르면서...

결국은 당시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님의 도움을 받아 인천 도립병원에 입원을 하게됩니다.

누나는 간병을 해야하니 병원엘 가있어야 했고, 오롯이 아이들만 남은 과수원집은 관리 목적상 빌려준 집 주인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겠지요.

자세한 영문도 모르고 어느날 우린 누나를 따라 산 비탈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이엉 덮어 만든 움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오동 배밭이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과수원집 아이의 기억은 꽤 짧은 기억이었습니다. 움집아이로 가는데까지 말입니다.

 

거기선 맨 눈으로 아침해를 바라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직 "우린 참 가난하다." 는 생각은 해 보질 않았습니다. 움집에서도 오래 살지는 못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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