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구 신선동 일대는 아침 풍경과 밤풍경이 싫지 않은 곳이었다.
아침 나절 영도 다리를 중심으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 풍경이 있었고, 밤이되면 부산 시내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운치 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모습들은 내 피부와 코에 낯설지 않은 가난의 느낌과 냄새가 있는 곳 이었다.
산 비탈 좁은 골목을 끼고 올라가는 길목 길목에는 좋은 위치에 좌판에 건빵을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고, 유리창 밖 진열대에 만화를 페이지를 나누어 진열해 놓은 만화책방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관계의 삼촌들과 난 이른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다.
대교동에서 타는 쪽배는 내겐 유일한 즐거움이었다고 나 할까? 약 5분에서 10분 정도 영도다리 밑을 통통돌아 자갈치 시장에 내려주는 통선을 승선하는 재미는 싫지 않았다.
자갈치 시장을따라 천마산?(철마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충무동이 나온다.
그 충무동이 내 생업의 터였다. 삼촌 형제들은 충무동 바닷가 공터에서 블럭을 찍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도 당연 그 작업멤버에 속했고...
일은 형상을 찍은 블럭이나 벽돌을 날라다 말릴 자리에 줄을 맞추어 놓는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근력이 쉬원찮은 아이들에겐 무리한 일이어서 무게를 지탱하려고 배에 살짝 걸치면 영락없이 원형이 손상될 수 밖에 없었다.
나중 그나마 팔뚝에 힘깨나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잘 훈련된 덕분이 아니었겠나 위로도 해 본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근본적으로 팔이 가늘고, 그 일을 했다고 해 봐야 10월에서 다음해 2월까지 고작 몇 개월 뿐이었으니까...
하여튼 그 일은 내게는 매일 매를 버는 일이었다.
블럭 한장을 손상시키면 빳다 한대. 종일 과업을 통해 어찌 한장만 버렸을까?
큰 블럭(보통은 인치로 규격을 매김)을 찍는 날은 공포스러운 날이다. 매를 저금해야 하는 날이니까...
퇴근 길의 공포는 그나마 작은 삼촌이 달래주었다.
맞는 것이야 어찌 저지를 못할지라도 위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끔 건빵도 사주고 - 그런 날이면 우린 걸어서 퇴근을 했다. 어떤 날은 참새 구이도 사줬다.
말분 가루라고 하는 것으로 쑨 죽이나 수제비로 저녁을 때우고, 한 차례 소동을 떨고 나면(매 정산) 비로소 내 시간이다.
그 때 늘 가 앉아 있던 자리가 장독대 비슷하게 시멘트를 이겨 부어 놓은 작은 공터였다.
거기서는 부산역이 보이고, 오뚜기가 마시는 주스도 보이고...
그 곳에만 가면 반겨줄 사람은 없지만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탈 수도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아는지라, 한참을 바라보고 앉아있곤 했다.
소중하게 끼고 내려간 하모니카도 위안거리였는데, 그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불 수 있는 기획 많질 않았다.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듣게 된 어른들의 용어 "피가 섞였나 살이 섞였나?" 외할머니가 새엄마에게 지른 호통이었다.
그때 새엄마에겐 혼담이 오가고 있었고, 새 엄마는 우리 때문에 혼담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피와 살이 섞여야 부모와 자식의 진짜 관계가 된다는 것은 그래서 비교적 일찍 알게 되었다.
이 일로 난 정 들이기 싫었던 부산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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