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먼 곳, 푸른 빛의 별들이 꿈처럼 빛나고

 

 어제 글에 잠깐 올렸던 ‘곽재구’라는 사람의 쓴 글 중 제목을 골라보았네.

제목 서문에 그는 이렇게 꿈을 꾸듯 몇 줄 올려놓았어.

 

“노인은 고기를 잡지 않았다. 달빛들이 스러질 무렵이면 노인은 그물을 걷고

 자신의 오두막 집으로 돌아갔다.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파는 노동은 평안할 수가 없다.

 

 어청도를 방문해서, 그는 이 곳 바다에 사는 고기들은 푸른 고기라고 생각했다네.

그리고 그 고기를 잡는 노인이 있었고,

종일 잡은 퍼덕이는 푸른 고기를 그저 다시 바다에 놓아주고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는 것.

 그 사람은 地名에서, 또 실제로 보이는 사물에서

그렇게 다른 눈으로 보고 느꼈던 것이야.

 

 동경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네만,

순수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일세..

 

 툴툴 털고 제가 보고 싶은 곳을 찾아 무작정 떠나고, 보고, 느끼고…

시간에 속박되지 않고 하냥 쭈그리고 앉아있기도 하고,

 

 글쎄.

그렇기는 하다고 하지만, 어떤가? 두성!

그게 자유로움이라 표현함이 맞을까?

아니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무책임함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지적일까?

그 사람이 남긴 몇 줄 글줄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무책임을 면제시켜 주어야 할까?

 

 내 생각은 이렇네.

내가 그 친구의 감성이 좋아 그저 감성을 감상하고 있을 뿐,

그 친구의 생활 그 자체를 칭찬하고 픈 마음이 하나도 없어.

 

 이 친구는 벗은 게 하나도 없음이야.

세상을 털었나?

속세의 연을 털었나?

자신을 버렸나?

그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이 안됨일세.

 

 어떤 글을 남겼든, 또 그로 인해 세인이 어떻게 그를 평가하든…

그는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걸세.

 

 끄적인 글 줄을 엮어 책을 한 권 내고자 하는 속인의 너무 무책임하면서도,

일견 기다려 지는 또 다른 평가를 그는 원했기 때문이지.

 

 보시게.

내 그 친구와 뭔 은원이 있어, 이리 평하겠는가 만은,

우리의 평안은 떠남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머무름에 있는 것이란 생각 때문일세.

떠남은 잠시 즐김으로 족하이…

 

 문득 원효 대사의 깨달음이 생각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거란 생각이네.

 

 지금 나이지리아는 한 바탕 새벽 비를 때리고,

새촘하게 다시 퍼부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심술궂은 하늘이네.

 

2008. 11. 12. 나루

 

 

버린다, 비운다는 것이

 

허무, 무책임하고는 거리가 머언..

 

깨달음이라.

 

글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 不立文字 )

선의 경지를 말함이라.

 

대자유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움과

거리가 있음이라.

세인의 평가 또는 세상의 평가,

이 또한 욕심이고 겉치레이며

분별의식이라.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간단한 쉬운 예를 듬세,

 

우리가 빠X리 할 때 절정에 올라

사정하는 그 순간 그때 !!!!!!

 

생활비 걱정, 지난 과거,내일 걱정,

세상의 평가,..etc.... 생각하는 놈 있음 나와 보라 그래 !!!!!

 

바로 그 순간 찰라,

우주와 合一,無念,無想..

대자유를 만끽 함이야..

 

( Exemple )가 적당해서

Feel Transfer 되었는지 모르겠구만 ?

 

2008. 11. 12. 두성

 

 

이거 마치 산방에 앉아 차 한잔 하고 있는 느낌 아닌가?

 

대 자유. . 엄청난 화두를 끼고서 말이지.

좋아. 느낌은 온다.

완전히 형이하학적인 깨우침이 속하긴 하네.

근데 그것도 다 사람 나름이어서 말이지.

어떤 부류는 밤낮없이 그 대 자유를 느끼고 싶을 거고…

어떤 이는 조금 격을 덜해서 밤을 택해서 하루 저녁에 서너 번의 대 자유를 찾는 이도 있겠고.

또 어떤 이는 그 놈의 대 자유를 어찌 찾아보려고,

시도 시도 하다가, 끝내 공허하게 헛 담배만 빨고 마는 경우도 있겠고…

 

그거 참.

선을 찾고, 도를 구함이 만만치가 않은 노릇이로세.

 

2008. 11. 12. 나루

 

쉬운 예를 들어 가슴에 와 닿도록 설명한 것이지,

어찌 밤일이 대자유라 할 수 있겠는가..

 

一切唯心造 가 말해주듯

모든 게 다 제 안에 있지.

 

제안에 적을 타파하는 순간,

비로소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어록도 있음이야.

 

그러니 말로도 글로도 표현 못하는

선을 찾고 도를 구함이

어찌 만만하겠는가.

 

도를 구하겠다고

화두를 갖고 면벽수도로

동안거 하안거를 거치며

대자유를 염원하는 거사들이

어디 한 둘이든가.

 

우린 이런 어려운 거 하지 말고,

그저 해변가에서 망각, 잔해나 부르고,

노래방이나 가서

긴머리 소녀, 편지나 부르며

지난 추억 되 뇌이며

술이나 기울이며 평상시 살던 대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가 구할 입니다.

 

불가에서는 平常心是道,

평상심이 곧 란 말입니다.  2008. 11. 12. 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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