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일은 그 몫이기 때문에 우리가 왜 섬을 떠났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이삿짐도 간촐했던 듯 기다란 장대로 배를 밀어내서 이어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가는 돛배에 우리 온 식구가 탔습니다. 나중 유행가 가사를 접하고 그 배가 '황포돛배' 라는 것을 알았지요.
뱃전에 아주 가깝게 찰랑이는 물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바다로 떨어질 것같아 무섭기만 했던 추억입니다.
그 때 손을 꼭 잡아주는 이가 있어 뱃전에 엉덩이를 까고 일을 본 기억도 있네요.
난 그이를 엄마라고 불렀지요. 안타까운 것은 기억이 굳어져 각인되기 전에 그이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없어진 통에 지금은 그저 그려 보는 얼굴이 되고 만거지요.
어른이 되어서 만나게 된 이모라는 분의 얼굴에서도 엄마 얼굴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그 얼굴은 그저 그리움으로만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아마 바람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이사하던 날이.
멀미를 했던 기억은 없네요. 식구들이 어떻게 있었을까 생각을 해도 그도 기억이 없네요.
할머니, 아버지, 엄마, 누나, 형, 그리고 나, 여동생이 함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도착한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어떤 교통편으로 이동을 했는지 또 한참을 가서 언덕길을 올라 산비탈에 있는 좁은 마루가 길게 깔려있는
방으로 짐을 옮겼습니다.
나중 이 방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방 한가운데가 움푹 꺼져 들어가 그 곳에서 섬을 나온 섬집아이의
짧은 도심 변두리 생활이 이어집니다.
거기서 배운 노래가 하나 있었는데요. 밴드 소리와 함께 자주 듣던 노랩니다.
"빰 빰 빰 빰 빰 빰 빰 동산 중고교"
아마 언덕위로 벋은 길 끝에 야구장이 있었던 그 학교가 동산 중고교였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인천서 야구 명문학교더라고요.
사업차 집을 나가면 한달 두달 집을 비우던 아버지가 어쩌다 오시는 날은 얄궂은 껌 같은 것을 들고
오시기도 했지만 반갑기보단 무서웠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엄마에게 호통을 치는 분위기가 되면 나보다 다섯살 많은 누나는 나를 데리고 - 아마 형도
데리고 갔겠지요. - 이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한 동안을 서 있다가 내려가곤 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할머니는 끝내 고향을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날 우리집에서 가까운 집에서 잤던 기억이 납니다. 이른 아침에 불려서 눈을 비비고 집으로 갔지요.
아마 할머니 임종이 가까워서 아이들은 이웃에 맡겼던 모양입니다.
간촐한 장례행렬이 언덕길을 내려 오는데, 커다란 호랑나비가 우리 주위를 따라오듯 맴돌았지요,
어떤 아저씨가 그러데요.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나비가 되신 모양이다."
그 후로 전 호랑나비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그도 환상이 깨졌어요.
김흥국씨의 비틀거리는 호랑나비때문에...
그 언덕길의 기억은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으로 가면서 바라보았던 주변의 집들과 공동우물을
끝으로 없어집니다.
당시 다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배다리(통배 같은 것 몇척을 엮어서 나무판으로 다리를 놓은)를
건너 이사를 가게되었습니다. 동네 이름이 가좌동이었지요.
산비탈에 몇 몇 집이 모여살고 있던..., 그 앞으로는 넓게 염전이 펼쳐져 있었고 기억하기로는
주안 염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엄청 많이 들어서서 당시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사 간 곳에서 국민학교를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아 아마 언덕위의 집에서는 한 1년 넘게 살았던 것 같네요.
'과수원길' 이라는 동요를 들으면서 떠 올리게 되는 마을 풍경은 이곳에서 비롯됩니다.
섬집아이가 과수원집 아이가 되었으니까요.
'친구방 > 나루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독급래(추억5) (0) | 2011.11.08 |
---|---|
과수원집 아이에서 움집 아이로(추억4) (0) | 2011.10.01 |
섬집아기 (추억 2) (0) | 2011.07.25 |
예전 같으면 (추억1) (0) | 2011.05.10 |
원숭이가? (0) | 2010.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