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힌 한 낮의 적막 속에서 (2)
제1차 세계대전 때, 마이트너는 여러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 중 동부 전선 근처의 지옥 같은 병원에도 있었다. 당시 한은 군 복무중이었다. 그가 독가스를 연구하고 있다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서는 둘 다 무심한 것 같았다. 그녀는 실험실에서의 이런저런 일들, 한의 아내와 함께 수영 다닌 일, 그리고 가끔씩 병원 일에 대해 편지를 써서 정기적으로 한에게 보냈다. 연구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말도 전했다.
“친애하는 한 씨, 먼저 심호흡을 한 다음 이 글을 읽어주세요. … 나는 몇몇 측정들을 끝내고 싶었답니다. 그래야 당신에게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마이트너는 모든 원소들을 규칙적으로 나열하는 주기율표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마지막 몇 개 중 하나를 채웠다. 그녀 혼자서 한 연구였지만 논문에는 한의 이름도 함께 써넣었고, <물리학 학회지>의 편집자에게 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보다 앞에 써달라고 부탁했다. 전쟁으로 헤어져 있는 동안, 마이트너는 한이 답장 쓰는 일로 부담 갖지 않길 바랐지만, 가끔씩은 그녀의 속마음을 살며시 드러내기도 했다.
“친애하는 한 씨! 건강 조심하세요. 그리고 가끔 방사능에 관한 글이라도 써서 보내주세요. 저는 아주 오래 전, 당신이 방사능에 관한 내용 말고도 가끔 소식을 전했던 일을 기억한답니다.”
전쟁 후 그들은 연구 주제를 다른 분야로 바꿨다. 1920년대 중반, 마이트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안에 있는 이론 물리학 부서를 이끌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내성적이었지만 자신의 지적 연구에 관해서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권위 있는 물리학 이론 세미나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와 함께 맨 앞자리에 앉곤 했다.
한편 한은 마이트너처럼 어려운 수준의 연구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전하고 좀더 단순한 화학 연구에 충실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1934년 페르미가 중성자를 핵의 내부로 들여보내 이상적인 탐사침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자, 마이트너는 다시 한 번 연구 방향을 바꾸어 핵의 성질을 연구하기로 했다. 마이트너는 한을 고용하기로 했다. 새로 형성되고 있는 물질을 연구하기 위해서 화학자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었다.
'친구방 > 와은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덮힌 한 낮의 적막 속에서(4) (0) | 2011.05.10 |
---|---|
눈 덮힌 한 낮의 적막 속에서(3) (0) | 2011.05.10 |
눈 덮인 한 낮의 적막 속에서(1) (0) | 2011.05.10 |
차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0) | 2011.05.02 |
'돌싱'과 '울총' (0) | 2011.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