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안 사실로는 내 성격은 혈액형에 근거해서 보면 썩 좋지 않은 B형이다.

사실은 아직도 크게 공감을 하진 않지만 그도 세가 있는지라 그렇지 않다고 고집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 자신이 B형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각설하고, 어릴적 내 성격은 그저그만했다. 여럿이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나서서 발표를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긴 했을 망정

피하지는 않았고, 결과도 썩 좋은 편이었다.(그것이 대회일경우 입상권에 늘 들었다.)

누구라서 그렇지 않겠는가만은 국민학교 시절 주변의 기대를 모았던 것도 사실이다. 도움이 있어 가능하긴 했지만 5학년 시절 군내 21개 학교를 대상으로 한

과학경연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을 했다. 당시 내가 다녔던 운천의 영북국민학교는 전교생이 4,000명 규모였으니까 꽤 큰 규모의 학교였고, 포천군에서는 제일 큰

학교였다. 그러니 그런대로 공부깨나 한 축에 드는 셈이었다.

고백하자면 군 대표로 도 대항 경시대회를 나갔는데, 문제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조차 몰라서 거의 백지를 제출했고,

실기도 엉기적거리다가 그냥 나왔다. 군 단위 학교와 도청소재지 관할 학교간의 교육 수준차이는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난 공교롭게도 인천이라는 동네서 큰 창피를 두번 당했다. 인천에 살 시절에 글짓기 대회를 나가서 대 망신을 당했고, 과학실기 경연대회에 나가서 거의

백지 답안을 제출하면서 또 한번 큰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두 번다 수준의 차이에 의해서 당한 결과일뿐 자질 부족이 원인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왜냐하면 글짓기의 경우 한번도 글짓기라는 것을 해보지도 않았음에도 학교 대표로 선발해서 출전을 시킨 학교당국의 책임이 있었던 것이고,

과학경연대회의 경우 포천군의 교육수준과 당시 도청소재지인 인천시의 교육수준의 차이가 너무나도 현저했었기 때문이다. 인천의 한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한번이라도 더 교재를 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책을 보고 있는데 장학사 선생님이 오셔서는 "책 볼 필요없다." 고 하셨다.

다음 날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교과서를 외운다고 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황하게 이 정도 배경설명을 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 공부깨나 한다는 인정을 받고 있었던 몸이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사실 우리 4남매 중 첫째인 누나는 1학년때 부터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고 하고, 그보다 2살어리고 나보단 3살 많은 형님은 그 보단 조금 못해서 3등 정도가

최고 성적이었다. 그면에 비추어 나는 1학년때는 잘 모르겠고 2학년 부터는 적어도 반에서 1,2위를 다퉜고, 4, 5학년 때는 전교 1등을 하는 수준이었다.

내 여동생은 4남매 중에서는 좀 쳐졌는데 등수가 썩 나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배경은 청량리 골목에서 형의 입을 통해 골목 안에서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졌다.

"저 놈이 지금은 호떡판을 긁고, 물을 따르고 허드렛일을 하지만 장래가 기대되는 놈이다."

리어카에 쌍화차와 커피 코코아를 싣고 다니면서 파는 할머니는 나를 만나면 꼭 코코아를 한잔씩 그저 타주시면서 "애가 머리결도 곱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돌이켜 보면 지금이 내 나이 정도가 되시는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다.

 

청량리 골목에서는 골목에 막내로 입성한지 얼마 안된 이 천재를 시험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가 진행되었다.

가벼운 성냥개비 퀴즈, 낱말 맞추기 등...

주변의 수준이 워낙 그래서였을까? "과연..." 이라는 평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격적인 천재 확인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소년동아일보에 나오는 국민학교 6학년 산수문제를 풀라는 것이 그것.

때가 4, 5월 경이어서 학업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자신있게 도전을 했는데...

"아!"

참담했다. 도내 과학경연대회에서 받아들었던 시험지에서 느꼈던 그 벽이 소년동아일보 산수 시험문제로 제목만 바꾸고 나타났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단원은 2단원이었고, 단원의 제목이 비율이었다.

한 문제도 풀질 못했다. 용어자체를 몰랐던 까닭이다.

소수를 분수로 고치고, 백분율을 소수로 전환하는 정도의 문제였는데, 비율도 퍼센트도 개념을 모르니 시도가 불가했다.

소년동아일보를 말아쥐고 호떡판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처음이었다. 배우지 않고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아직 철 나긴 좀 이른 호떡집 아이를

좌절시켰다. 그럼에도 공부를 하기 위한 어떤 다른 시도를 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런 동생이 안타까웠던 형은 슬그머니 한자교본을 갖다주기도 하고,

날짜지난 소년동아일보를 갖다주기도 했다. 6학년 산수문제는 더 이상 내 영역일수가 없었던 까닭에 소년동아일보는 내게 반갑게 소년 007을 만날 수 있는

장면을 제공해 주는 매체일 뿐이었다. 그런 호떡집 시절도 길게 가지는 않았다.

이젠 잠시 거치고 끝낼 남의 집살이가 아니었기에, 살아 갈 방도를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호떡장수는 내 계획에선 너무 먼 장래였고,

당시 주변에 어린 머리를 자극하고 자극했던 '기술'은 더더구나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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