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부 재직시절 업무적인 목적으로 가입한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아직 한 줄도 글을 쓰거나 인사 말을 남기고 나온 적은 없지만 부지런히 드나드는 카페 회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업무적인 인연도 없는데 말이지요.
어느 날 우연하게 접한 황인숙 시인의 가슴 후비고 들어오는 시평을 본 후 ‘혹 오늘은…’ 하는 마음으로 들어오게 되었네요.
같은 현상 내지 어떤 사람의 함축된 말이나 글 표현을 그렇듯 멋들어지게 원래의 의미나 형상으로 재 해석해 내어 그이의 말로
다시 담담하게 때로는 격하기도 하게 써 내려가는 시평은 충분한 공감을 자아냅니다.
오늘 그이의 시평 또한 그렇습니다.
이젠 땅 위에 살아 있는 친구들이나 먼저 가서 땅 속에 있는 친구들이나 그 수가 비슷한데,
그렇다고 새 친구를 원하진 않으니, 옛날 내 친구를 있는 그대로 보내달라는 시 ‘바다 등나무’를 황인숙 시인은 시 소재로 등장한
등나무가 아니고 남산 길을 버텨주던 플라타너스 나무로 살짝 대체해서 맺는 멋진 뒤집기를 해 보입니다. 역시…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 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아무리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친구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라도, 더이상 사람을 사귀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게 되는 시기가 있다. 사람마다 품이 다르니까 무한정 친구를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사십대 중반쯤 되면 이미 친구가 충분히 많다고 포만감을 느낀다. 매사에 그렇거니와 타인에 대한 호기심도 관심도 엷어지기 시작하는, 즉 타인에 대한 의욕이 줄어드는 나이.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건 의욕만이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진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느덧 이승의 친구보다 죽은 친구가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은 그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죽음도 멀리 있지 않은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가 절벽 위 등나무 아래서.
나무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 같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측백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벚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한다. 남산 하얏트호텔 건너편에 야외식물원이 있다. 그 맨 꼭대기에 플라타너스 길이 있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둥치에 아주 높다랗게 키가 커서, 그 아래 있으면 깊은 숲에 숨어든 듯 아늑했고, 우듬지를 따라 하늘을 헤엄치는 듯 머리가 시원했다. 재작년엔가, 그 플라타너스들이 전부 사라졌다. 쉰 살은 족히 넘었을 그 나무들을 누가 왜 베어버렸는지 꼭 밝혀내리라. 그리운 플라타너스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