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방/나루의 방

예전 같으면 (추억1)

날우 2011. 5. 10. 21:31

예전 같으면 아마 동네서 한참 어른 행세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쓰고 나니 불현듯 슬픈 생각이 듭니다. 사실 고향을 떠나 본적지도 바꾸어 신고하고 살았던 입장이고 보면, 어른 대접을 할 대상이 없었겠다 싶었던거지요.

원적은 이북이었죠. '황해도 연백' 이제 그도 행정 구역 개편이 되었으니 황해남도라고 해야 할라나요? 고향을 눈 앞에 두고 보아야 맘이 놓일 것 같았던 어른들의 피난 행렬은 남과 좀 달랐던지 지척에 고향을 둔 섬으로 잠시 봇짐을 풀었던 모양입니다. 모르겠네요. 장봉이니 지념이니 살섬이니 어른들이 불렀던 지명들이 아직 그저 머릿속에 남아는 있는데 내가 태어난 곳은 당시 부천군에 소재되었던 작은 섬 '신도'라는 곳이고요. 지금도 신도는 그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정겨움도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인천으로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그곳의 풍경은 그랬습니다.

나무로 짠 양쪽 여닫이 대문이 달린 일자집에 살았었고요.

대문을 나서서 마당에 이르면 오른쪽 끝쪽으로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돼지 우리로부터 골을 타서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어 돼지가 배설한 액체 오물이 고이도록 해 놓았었고, 모르긴 해도 텃밭 거름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트막한 산등성이 하나를 넘고 땅콩밭을 지나면 연못이 하나 있었지요. 아마 마을 아낙들은 모두 이 연못에서 빨래를 했던 모양으로 난 자주 그 연못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를 따라 갔겠지요만 그때 발래통을 이고 나보다 앞서 잰 걸음을 하셨을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쉽게도 없습니다.

비교적 긴 시간이었겠지요. 엄마가 빨래를 다 할 시간까지는...

작은 돌을 연못에 던지면 작은 동그라미가 만들어져서 점점 퍼져 끝에 닿던 모습을 오랫동안 보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연못이 아주 작았었다고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나중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다른 동네서 학교는 다녔지요.)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는 노래를 배울 때 머리 가득 그 연못이 자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복스러운 일입니다.

때론 잊고 싶은 기억도 있어 외려 괴로울 때도 있지만 말이지요.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먼 나라에서 보내면서  난 '벌써'란 단어 말고는 다른 단어를 아는게 없는게 아닌가 싶게 긴 세월을 '벌써'로 반추했습니다. 다행스럽게 친구가 있었고, 처남이 있어서 그저 조촐하지만은 않았습니다만 바짝 구워 딱딱해진 오징어다리를 몇 번 입속에서 굴려 눅눅해서 만만해 질때까지 기다려 씹어야 했던 술자리는 그렇네요. 좀 슬펐네요.

 

그러면서 생각했던거지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세월이 날 여기까지 떠밀고 왔구나.'

인정하면서 살아야지요. 다른 준비가 필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위로 받은 것은 아내에게 전해들은 우리가 결혼한 햇수 보다 한 3년 늦게 태어난 작은 아들아이가 자정이 막 지나자 마자 제 엄마 휴대폰에 넣은 메시집니다.

'엄마! 아빠를 만나 주어서 참 고맙습니다.' 아주 함축적인 축하 인사였네요.

 

그렇습니다.

아직 고향이란 곳에 발 붙이고 살았다면 뒷 짐지고 마을 어른 행세 했을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천상 철 나지 않은 어른이겠습니다.

아직 멀리 볼 줄도 모르고, 돌려 들을 줄도 모르고, 배려할 줄도 모르는 그런 아이 같은 어른 말입니다.

결혼 30주년이라는 축하 받을 단어를 주절거리면서 왜 잡지 못한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어지럼증 같이 맴도는지 알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