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얘기방

요나의 믿음 다시 보기

날우 2023. 10. 27. 13:46

성경 기록에 요나서는 다른 것에 비해 짧은 예화수준이고,

불순종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인용이 되는 내용입니다.

길지 않게 소개되는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소개되는 반면에 말이지요,

성경 해석을 하시는 분들도 요나에 대한 다른 문헌의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고 그러는 것을 보면 아주 단편적인

예로 소개되는 말씀은 맞는 것 같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명하십니다. "니느웨(니느웨는 대 제국이었다고 해요. 앗시리아, 시리아로 불렸던)로 가서 

너희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전하라."

그 나라는 과거 이스라엘을 오랜 기간 점령하고 종살이 시켰던 나라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침탈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요나의 입장에선 그들은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이었겠지요.

역사중에 패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꼈을 테구요.

그래서 하나님 명을 거역합니다.

난 거기 안갑니다.

그런 패악한 민족을 위해서 내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까?

그리곤 아마 또 다른 말로 하나님께 항변했을 겁니다.

"걔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요나는 니느웨와는 다른 곳으로 배를 타고 도망을 가지요.

끝내 하나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관계로 풍랑을 만나 바다로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성 3일간은 갇혀있다가 

니느웨 해변에 토해집니다.

마지못해 하나님 말씀을 대충 전했는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지요.

백성들이 회개합니다.

심지어 동물에게까지 베옷을 입혀서 회개에 동참을 시켰다고하니까 온 성읍이 회개의 물결이 일어난거지요.

요나가 깜짝 놀랍니다. "우째 이런 일이..."

그러면서 또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럴거면 뭐하러 날 시켜서 이 싫은 일을 하게 하셨나? 하나님 다 알아서 하시면서...'

 

 이제 생각할 부분입니다.

1.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고 벌 주셨나? 

    아닙니다. 풍랑가운데 죽을 수도 있었을 요나였지만 끝내 구하셨고.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반성하게 하시고,

    하나님 당초 지시하셨던 선교의 사명을 끝내 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 끝 부분에도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말로 재 해석해보면 "아이구 이 골통아 네가 자꾸 심통을 부리는데, 봐라 니느웨에 말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어서 마땅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12만명이나 있고,

    가축들도 많아 그러니 다른 못된 놈들을 혼내려고 내가 걔들을 다 진멸하는 것은 옳지 않잖니?"

    라고 오히려 요나를 달래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2. 그럼 요나는 하나님 명령을 불순종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이 두려웠을까요?

    도망가면서 '잡히면 죽을테니 배 밑창에 깊이 숨자.' 이런 맘으로 배 밑창으로 갔을까요?

    그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전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면 요나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배 밑창을 택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싫고, 자기 맘에 차지않는 명령을 하신 하나님께 심통이 나서

    배 밑창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일종의 시위랄까?

    "하나님은 그릇된 명령을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이런 심정으로 말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요나는 기도합니다.

단적으로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됐습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 들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건지셨고,

다시금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사명을 실행케합니다.

요나의 무성의한 외침(사흘걸이의 성읍을 하루동안 다니며 외친 것으로 짜증을 표했죠.)

그런데 요나는 덤벼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제가요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진멸하지 

않으실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간겁니다."

그리곤 한 마디 더합니다.

"이젠 차라리 날 죽이세요. 이런 일을 계속 시키실 양이면..."

 

 하나님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이놈 방귀뀐 놈이 성내고 있구나. 너 지금 이러는게 맞아?"

야단 치신게 아닙니다. 아이고 저녀석을 어쩌면 좋아 하는 심정이 보입니다.

 

 이쯤에서 짧은 생각을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에게 일을 시키시고,

끝내 이루십니다.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외칠 최적임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요나로 하여금 외치게 만드시고 이루시지요.

 

 요나의 믿음에 대해선 별로 취급을 안하는 것 같은데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물론 복 주시는 하나님도 있지만 그건 절대적으로 하나님 뜻에 부합할 때 가능한 일로 우린 인식하고 있지요.

순종이란거는 무조건 엎드려서 머릴 조아리고 무서워 떠는 그런 행동은 아니라고 봐요.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믿음은 자애로운 아버지에 대한 막내아들의 응석섞인 믿음이 아닌가 합니다.

이루어주실 줄 당연히 믿기에 두려움이 없는 그런 믿음.

입 삐죽 내밀고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내가 이거 무지 싫다는 것 아버진 알아야 해요."

왜냐면 하라시는 이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선 이루신다는 더 큰 믿음이 그 마음 가운덴 있었던거지요.

 

 요나의 믿음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순종의 대명사 요나가 아니고.

응석받이 막내 요나의 믿음으로 말입니다.

요나 응석의 끝판왕은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셨던 박넝쿨을 벌레 먹게하여 거두신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귀여움의 절정이지요.

강한 햇볕을 피할길이 없어지자 요나가 하나님께 외칩니다.
"왜 박넝쿨은 거두셨어요? 너무 뜨거워서 정신을 못차리겠네. 이럴바에 차라리 죽이세요."

하나님께서 대답하시죠?

"네가 지금 박넝쿨 거두었다고 화를 내는거야?"

요나가 지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내가 지금 미치고 팔짝 뛰겠어요. 그러니 죽는게 낫달밖에요."

 

어떤가요?

응석받이 아들을 귀찮게 하는 짖궂은 아버지의 장난스런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그에 지지않고 바락바락 덤비는 아들의 모습도 아울러 보이고요.

그 어느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보다 자애로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경이 요나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