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스승님? (추억 25)
경기도와 서울 경계에 위치한 내가 졸업한 중학교는 아주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미션 스쿨이어서 선생님들도 모두 크리스천이어야 한다는 임용 조건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고, 매주 수요일
예배는 믿는 선생님이건 아니건 대표 기도는 의무적으로 하게끔하기는 했었다.
작은 규모이고 보니 선생님과 학생들간의 교류랄까 유대는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싫어하는 선생은 있었고, 미움 받는 학생도 물론 있었겠다.
보편적으로는 학생들에 대해 선생님들의 지도 관심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졸업 후에도 한 동안 연락을 끊지 않았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1학년 때 담임이셨던...
11월에 전학을 간 첫 날 조회 현장은 이른바 '충격' 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는 "생활 목표 시~작!" 하자 일제히 큰 목소리로 급훈을 외웠다.
첫째 진실하자
둘째 이상을 품자
셋째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자
내가 아직 이렇듯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친구들도 당시 급훈을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안다.
각설하고 - 이 담임선생님이 대단히 멋진 분이신데다가 팔방 미인이셨다.
과목 선생님이 결원될라치면 과목을 불문하고 대강(代講)도 하셨다. 주 담당 과목은 생물이었는데, 체육 선생을 기본적으로 겸했다.
게다가 노래도 잘해서 수요 예배 후 따로 남아서 음악선생님 반주에 맞춰 노래 한 두곡을 하고 올라오시곤 했다.
진학 실패 후 돌연 그 선생님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그 선생님은 건강 상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시고, 당신의 전공을 살려서 서울에 사무실을 내고 개인 사업을 하고 계셨다.
반가운 만남이었어야 했는데 멋적은 만남이 되었다. 고등학교도 그 선생님이 좋아서 꼭 그 학교를 나오고 싶었는데 실패도 했고...
오랜만의 만남에 선생님이 한 마디 먼저 던졌다.
"너 많이 바쁘다면서...?"
뭔 영문 모를 인사인가 싶어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더니,
"술도 먹어야 하고, 담배도 펴야 하고..., 그런 친구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마 누나가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을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좋을까 정도의...
선생님은 한 번도 누나 얘긴 안 했다. 그러면서도 '어찌 누나 마음도 모르고 넌 정신을 못 차리냐?' 는 뜻의 비아냥 거림식 나무람을 계속하더니,
"뭐 그래도 때 되면 배는 고픈 것 아니겠냐? 뭘 먹을까?"
중국 음식을 시키면서 끝까지 약을 올렸다. "잘 하시는 술 한잔 곁들여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러지는 않았고, 그날 선생님 사무실에서 참 맛 없는
짜장면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난 자취방에 들려 간단하게 보따리를 꾸려서 선생님 사무실로 다시 갔고, 그 길로 짧은 안내를 받고는 종로3가 역에서 전철을 타고는
바로 수원으로 갔다. 엄밀하게는 화성군 칠보면에 있는 고무 벨트(허리띠가 아니고, 공업용 벨트) 공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나의 학업포기를 용인할 수 없다고 하셨다.
또 먹고 살길이 막막한 내 현실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취한 선택이 대학 동기가 경영하는 회사(공장)로 가서 잔 심부름하면서 나름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고, 돈도 모아서 꼭 원하는 대학을 가라고 하셨다.
그 전에 만난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 얘기도 빼 놓을 수 없는 선생님 얘긴데,
이런 스승님들이 내 생활의 든든한 밑 거름이 되어 주셨음을 거부 할 수는 없겠다.
어쨋든 그런 인연의 연결을 통해 양계장을 개조해서 만든 벨트 공장에서 아직은 앞날을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장은 밭 가운데 볼 품없게 지어진 스레트 지붕 건물이었고, 이른바 안채라고 할 수 있는 부엌 한 칸 방 한칸 짜리양계장 주인이 살던 집이 있었다.
기술이 없는 난 매일 나오는 제품을 정리해서 재고를 파악하는 이른바 창고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직원들 밥을 해 주는 아줌마가 없으면 제일 덜 바쁜 내가 밥 당번이었는데, 그 때 학창 시절 자취 경력이 화려하게 발휘되었다.
그 공장에서 고등학교 출신자는 공장장 형을 포함 단 세명이었고, 10여명 직원들은 대부분 동갑 나이였음에도 경력과 관계없이 공장내 서열이
정해지는 묘한 현상을 보였다. 이것도 사회 질서 중 하날까 싶은...
그 곳의 생활은 단조로움 그 자체였지만 싫지가 않았다. 토요일이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 수원으로 나가는 재미도 있었고,
공장 뒤 나트막한 산 비탈을 끼고 옹기 종기 모여사는 동네의 모습도 정겨웠을 뿐만 아니라, 그 비탈의 중턱에 자리 잡은 아주 시골스러운 교회도
낯설지 않았는데, 그 교회에 오래 출석하지는 못했다 기억에 한 두번 출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