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캐(추억 22)
10월쯤일까?
약간은 선선하다 싶은 계절로 기억되는데...
고모집에 경사가 났다. 4딸 끝에 귀한 아들이 생겼다. '쌍토 규에 심을 식'
난 그 때 이 이름으로 글짓기를 했었다. 참 잘생긴 녀석이었다. 지금도 잘 생긴 동생이다. 의리도 있고...
녀석은 나이 차이 많은 4촌형을 꽤 무서워하면서 컸다.
내가 있는데서 감히 밥투정을 할 생각도 못했다. 엄마나 아빠는 그게 많이 궁금했겠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기겁을 할 일이었을게다.
지금도 그 얘길하곤 하는데, 당시 변소라는 것은 크게 항을 만들어 변을 모아두었다가 치워내는 그런 구조였기 때문에 고운말로
작업의 편의를 위해서 이 항이 밖으로 돌출되는 구조로 지어졌다. 그러니 겨울엔 얼고, 여름엔 녹고 뭐 그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우리 곁에 있는 필수 공간이었다. 녀석이 밥투정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안고 나가서는 그 입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밥먹을래 들어갈래"
밥 먹는게 낫고 말고...,
언급했지만 고모집은 절대적인 공간 구조상 내게 할애된 공간이 없었다.
그러니 밖에 있는 시간 만큼이 내겐 자유로운 시간이었고, 가급적 늦은 시간 들어와서 공간 한 귀퉁이를 점해 잠을 청하고,
큰 가방(전체 수업분 교과서를 늘 넣고 다녔다)에 도시락을 받아 넣고 학교로 가는 그런 일상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친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도시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침밥도 해결하고 등교하는 일도 많아졌다.
심한 날은 10리가 넘는 동네에 사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잘만 배합하면 아쉬운대로 잠잘 공간과 꼭 필요한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도는 것이 좋아서는 아니지만, 그런 일상이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집에서의 별명이 '벌캐'였다.
'논벌이고 밭이고 싸 돌아다니는 개'라는 뜻이었다. 크게 감정이 섞여서 그리 부른 것은 아니고, 내 행적을 대표하는 멋진 별명이었다.
혹은 김삿갓이라고도 불렀다. 가끔 집에 들렀단 가고 그랬으니까...,
당시 키가 남보다 좀 크다는 이유로 배구부로 뽑힌 이후엔 더 그런 경향도 강해지긴 했는데, 문제는 빨랫거리였다.
하얀 체육복을 입고 운동을 했는데, 맨 운동장에서 맨날 뒹굴어야 했으니 체육복은 맨날 진흙으로 떡지곤 했다.
4촌 누나가 그 빨래를 주로 맡아서 했고, 내 교복은 항상 날이 서 있었는데 그것도 누나 작품이었다.
꽤 깔끔하게 외관관리를 해 주었다. 나중 듣기로 그 때 체육복 빨래해 대기가 참 힘들었다고 했다.
벌캐는 좋은데, 이 놈에겐 꿈이 같이 크고 있지 않아서 문제였다.
요즘 유명가수의 노래 중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던데... 그 땐 정말 장래 희망을 정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선 중학교가 내 학력관리로는 마지막 코스로 알고 있었던 분위기였으니까...
라디오 기술이 당시엔 대세였던 듯 '라디오 기술이라도 배워서... 먹고살 궁리를 해야지...' 그렇게 내 청년 계획은 주변의 어른들에 의해 설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