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방/나루의 방

좋은 것을 택하면 바꿔야 할 것이 있다(추억 19)

날우 2016. 1. 5. 11:29

  신설동에 소재한 이른 바 허가난 이발소는 우선 분위기 부터 달랐다.

번듯한 건물에 깔끔한 의자며 아늑한 실내환경, 그리고 면도사 누나들도 둘이나 있었다.

모르긴 해도 내가 잘 배워놓은 면도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없지 싶었다.

 

이제 한 일당 하는 입장이 되긴했는데,

문제는 끼니를 챙기는 일이 난감하게 되었다.

전에 근무하던 곳은 좁고 지저분한 무허가 업소이긴 했으나, 인간미는 있었다.

하긴 아침 밥 거르기는 마찬가지 상황이긴 했다.

예전에 있던 곳에서는 그나마 점심, 저녁은 같이 나눌 수가 있었는데,

여기선 온전히 세끼를 나 혼자 해결을 해야만 했다.

 

양은 냄비를 하나 샀다.

쪽문을 열고 나가면 뒤꼍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가 있는데, 그곳이 내 주방이자 식당이었다.

가까운 시장에서 마른 반찬을 사면 되기야했겠으나 그게 매끼 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간장하고 마가린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내 주방 통로는 부끄럽게도 안방서 내다 보이는 곳이었는데, 어느날 안방 창에서 작은 냄비하나가

불쑥 나왔다. 당시에는 '식모'라고 불렸던, 나보다 한 두어살 많을 것 같은 계집아이가 내민 김치였다.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혹 고향에 있는 남동생 생각에 눈물 훔치면서 김치를 옮겨담았을지도 모를일이다.

그 후로도 한 두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의자 잠에, 좁은 통로에 쪼그리고 끼니를 해결하는 일을 오래 지속하기에는 어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당시 이발기구상은 일자리를 알선하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세 달을 채 못 버티고, 알선업체를 찾았다. 이젠 이곳의 생리를 좀 아는터라 별 어려움은 없었다.

인상 좋게 생긴 아저씨가 보자고했다. 면목동에 있는 이발손데 손을 구한다고, 바로 가잔다...

그래도 예의가 아닌지라 하루 이틀 말미를 구하곤, 좋은 이발소 사장님께 옮길 뜻을 비쳤다.

회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사람을 구할 때까진 있어야 된다고 했다.

어리긴 했지만 정은 아는 터라 더 이상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날 큰 소리로 꾸지람을 들은 김에 보따리를 꾸렸다.

보따리는 참 초라했다. 낡은 책가방과 와이셔츠 박스가 전부였으니까...

대견하게도 까만 비로도 천으로 표지를 만든 사진첩은 지성으로 들고다녔다.

나중 형님께 이관한 부모님(엄마 사진은 없는대로) 기억에 대한 유일한 유물이었다.

 

면목동이라고 해서 나를 위해 준비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선 밥 세끼가 해결되었다. 항아리를 파는 아줌마 집에서 이발소 식구들 밥을 제공했던 까닭이다.

요즘말로 집밥을 참 오랜만에 먹게 되었다.

 

여기서 인연도 몇 달로 끝나게 되는데,

내 소년시절 생계를 위한 방황은 여기서 종결된다.

 

누나가 날 불렀고,

'이젠 공부하자' 며 그간의 수고를 달랬다.

 

고모 내외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쓴 시도였는데, 청량리 호떡집으로 갈 그 당시 어른들의 주장은 아직

변함이 없었던 까닭이다. "빨리 기술을 배워서 먹고 살 궁리를 해야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라는 것이

어른들이 주장이었다.

 

불과 다섯 살 많은 누나의 주장이 어른들에게 어떻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여곡절 끝에 예의 그 보따리를 챙겨서 고모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