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편지(추억 15)
어른들의 방식은 비슷한 모양이다.
평소엔 어쩌다 어른들의 말 틈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눈 속에 아이를 잡아 가둘 정도로 부릅뜨고는 '어디 어른들 말하는 데 참견을 하는가?'고
불호령을 하시는 분들이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뒤로 미루거나 남에게 떠 밀어놓은 식의 방식을 택한다.
부산서 어른들은 연필을 쥐어주며 누나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다.
누나는 기차비를 부쳐왔고, 그 여비로 서울로 왔다.
언 손 비비며 도착한 고모집에서 불과 2~3일을 보냈을까?
잠시의 여유와 평소 먹기 힘든 쌀밥을 끼니마다 먹을 수있는 행복을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하루 시간이 24시간이라면 사실 모든 시간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뭔가 주변을 싸고 도는 공기는 그 때가 겨울이라서가 아니고 하여튼 춥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4촌동생들과 어울려 화단곁에서 까르르 까르르 넘어가게 웃는 동생의 웃음소리도 그래 그런지 추웠다.
그게 긴 이별의 전조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어른들은 내게 말했다.
"누나에게 편지를 내라." 결국 여기 어른들도 부산 어른들과 같은 절차를 거쳐가는 모양이다.
어른들 맘에 들게 편지를 썼다. 누난 참 나쁘다고..., 서울역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 온지가 벌써 몇일이 지났는데 아직 연락도 없느냐고...
모르기는 해도 연락은 닿지 않았을지라도 누나는 내가 어떤 방법을 택하든 고모집에 갔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똑똑한 동생이라고 여겨줬던 누나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누난 날 똑똑한 동생으로 여긴다.
편지는 이번에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를 날아갔고,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서 누나가 왔다.
행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까지 처녀라고 하기엔 어린 나이였으니 막 예쁜살로 갈려가고 있을 즈음의 고운 처자가 아니었겠나?
그런 처자는 펑펑 울었다.
고모를 보고 울었다. 나를 바라보며 울었다.
그러나 영화처럼 끌어안고 울지는 않았다.
누난 고모를 비롯한 어른들과 대화를 할 땐 어른들 반열에 들어있었다.
애들은 모른다 그런데 5살 더 먹은 누나는 아직 어른의 어깨로 벌어지지도 않은 그 위에 어른들의 요구의 짐을 가득 얹어가고 있었다.
그날의 결정으로...
우리 4남매는 꼬투리 터진 완두콩처럼 사방을 향해 튀었다.
동생은 어딘가 잘 사는 집으로 보낸다고 했다. 잘 산다니 다행이었다.
나이가 어리지도 않고 애매한 내가 참 골치 아픈 존재였을텐데...
그도 잘 정리가 된 듯 했다. 청량리 어디론가 가서 당분간만 있자고 했다.
동생을 다시 못 만난다는 생각을 아직 안 했기에, 잠시간의 이별로 하고 동생만 고모집에 남겨두곤 내길을 갔다.
전학증이 고이 들어있는 예의 그 가방은 여전히 신주처럼 내 품을 떠나지 않았다.
낯선 곳 청량리.
거기서 난 운천서 먼저 서울로 간 형을 만났다.
서울사람이 되어서 그런지 얼굴도 허옇고 예전보다 확실히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 청량리에서 내가 있을 집은 형이 알아 본 모양이었다.
형이 있는 가게 주인인 먼촌 형님께 인사드리고 간 곳은 같은 골목에 있는 호떡집.
주인아저씨는 머리가 태생적으로 좀 노란색 곱슬머리였고, 아줌마는 몸집이 좀 있는 후덕한 스타일이었다.
나의 서울 생활이 다시 시작된건 청량리 호떡집이었다.
청량이야 낯설지가 않은데 호떡집을 영 낯설었다.
이상한 건. 그날 이후 그 집에서 일하는 전 기간동안 호떡집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몹시 현실적이지 못한 어린이였던 모양이다.
이젠 골목생활에 빨리 적응을 해야 하는 일만 남았다.
2015.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