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느려진다
< 갈수록 느려진다 > - 文霞 鄭永仁 -
오래 전에 단독주택에서 고층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매일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며 생활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단독주택의 수평적 생활에서 아파트의 수직적 생활이 잘 적응이 안 되었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가 너무나 빨라 어질머리가 생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갈수록 엘리베이터가 느리다고 느껴졌다. 절대적인 속도는 그대로인데 상대적인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기실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예나제나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차츰 고새를 못 참아 ‘닫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어 번씩……. 그래도 점점점 엘리베이터의 속도감은 느려져만 간다. 자동차 운전도 그렇다. 초보 때는 저속도에서도 무척 빠르다고 느껴져 살살 운전했다. 시간이 지나가니 이젠 속도감에 맛을 들여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한속도를 넘어 과속까지 눈 깜짝 안하고 하게 되었다. 느린 속도는 마음에 안차 답답하게 느껴진다. 앞차가 느리다고 생각을 하면 투덜거리거나 급기야는 신경질적으로 클랙션을 누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조수석에 탄 집사람까지 차가 느리고 막힌다고 궁시렁거리기 시작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가니 내가 속도감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번 길들여진 맛을 제자리로 돌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치 큰 차에서 작은 차로 내려서는 못 탄다는 속설처럼 말이다.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말 같이…. 이젠 단 몇 초도 못 참고 느리다고 야단이다. 컴퓨터 부팅도 갈수록 느려져만 간다. 이젠 속도가 내 생활 깊숙이 지배하고 하고 있다. 단 몇 초가 길고 느리다고 생각되듯이…. 그러니 입에서 ‘빨리빨리’라는 말이 아예 붙어버려 상용어가 되었다.
물론 21세기는 속도전의 시대라고 하고 있다. 쌍둥이도 세대차 있다는 말처럼,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하면 단박에 무엇을 검색할 수 있다. 반면에 빨리 알기 때문에 빨리 잊고 잃어버린다. 오늘도 뒤차에서 내 차기 느리게 간다고 ‘빵빵’ 거리고 있다. 뒤차 젊은 운전자는 아마 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저 꼰대가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닐 것이지, 차를 끌고 나와서 웬 지랄이야!” 하기야 어느 대통령 후보는 나이 든 꼰대는 투표도 하지 말라고 하고, 이즘 어느 국회의원은 79세는 집에 가서 쉴 나이가 아니냐고 야단이다. ‘지들은 안 늙는 건지, 혹은 고령화 시대에 접어드는 조국의 현실을 파악이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는 사실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빠름으로 중독되어 가고 있다. 마치 느린 것이 죄악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느림이 어리석음의 대상이 된다. 에스컬레이터에선 좌측에 서면 꼴통으로 여긴다.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눈총의 대상이 된다. 하기야 얼마나 바쁘면 그 위에서도 스마트 폰을 보고 가는데…. 자동차 속도, 인터넷이나 엘리베이터 속도 등이 점점 빠르게 변하고 또 그렇게 느껴지고 있다. 심지어 음식 주문 속도나 배달 속도도 빠른 게 닥상이다. 느린 사람은 진상처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짜장면 한 한 그릇도 느리게 나온다고 야단이다. 하기야 불란서 파리 어느 식당 셰프는 한국인 여행객은 받지 않다고 한다. 한국인 여행객은 자기가 정성 들여 요리한 음식을 맛볼 자격이 없다고 한다. 주문하자마자 느리게 나온다고 야단이고, 나오면 후딱 먹고 일어선다고…. 적어도 한국에서는 동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느림보 거북이 보다는 빠름보 토끼가 더 선호의 대상이 된다. 토끼를 깨워준 거북이는 좀 모자라는 대상으로 분류된다. 한참 서서히 튼실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까지 속독법이 유행하고 있다. 초등 6학년에서 수학 정석을 빨리 배워야 하고, 초등학교부터 의대진학반이 생기기까지 말이다. 그들에게 빨리 돌아가는 학원 차 순회에 꼭 쬐어야 할 비타민 D의 햇볕을 쬘 여유조차 허락 하지 않는다. 빠르게 읽어서 나보다 빠르게 더 많은 지식을 갖자는 것이리라. 하기야 유아에게 1,000권 책읽기 목표를 정하여 독서를 강권(强勸)하는 부모도 많으니…. 그러게 모든 생각이나 행동이 빨라야 한다. 그 아이들도 속도감에 중독이 된다. 그렇게 빠른 지식 습득은 빠른 결정이나 판단을 내려야 하고 행동을 한다. 빠른 생각이나 결정 판단은 인생의 섣부른 길을 선택하기 십상이다. 또 이즘처럼 뜻밖의 시고를 유발할 수 있다. 너무 빠른 지식 사용은 그걸 슬기롭게 써 먹는 지혜로 전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혜란 지식을 슬기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도 그렇다. 과속하면 무리가 오듯이 생각의 속도도 과속하면 무리가 올 것은 당연하다. 이 생각의 속도도 인생의 규정 속도에 의해 운전해야 하지 않을까.
천천히 가야, 멈춰서 봐야 보이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주마간산이다. 나는 여행을 가면 빨리 가는 교통수단을 종하하지 않는다. 고속버스, 고속열차, 물론 비행기는 주위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없다. 물론 내가 운전하면서 가는 승용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생각을 빼앗기 때문이다. 또 생각이 과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은 느려야 볼 것이 많은 법이다. 누가 그랬다. 영혼의 여행은 독서이고, 온몸으로 하는 독서는 여행이라고. 온몸으로 보려면 느리게 가야 한다.
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에 느림보 거북이로 떠나보자. 토끼처럼 빨리 뛰지 말고 천천히 가는 여행을 가 보자. 지는 낙엽 하나 티끌 하나에도 삼라만상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느껴 보자. 가을 풀벌레 소리를 빠르게 가서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시간이 없다고 야단이다. 시간의 기근(飢饉) 속에 허덕인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가야 할 정도로…. 거기다가 자기 시간만 이야기하지 남의 시간은 나 몰라라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당신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Give times give you time)’ 라고 한다.
우리는 시간을 꼭 차게 채울 수가 없다. 시간도 항아리처럼 비워야 다른 시간을 채울 수가 있다. 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또 내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한 그릇의 짜장면에게도 시간을 주어야 제대로 된 짜장면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느림보 거북이처럼 양반걸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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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youn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