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기침에 섞여 나는 눈물(추억 14)
길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했다.
이제 여기서 남으로 벋은 이 비포장 도로를 따라 10리만 들어가면 고모집이다.
이 보다 더 어렸을 적, 우리보다는 비교적 사는 정도가 나았던 고모집엘 가면 아침 나절 더운 우유도 내 주고,
간식거리 고구마도 있고, 쌀 밥도 먹을 수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밥 다운 밥을 먹지 못했던터라 배가 고팠던지 우선은 한상 먹을거리를 챙겨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이들 걸음에 10리길은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당초 낯 익은 길이야 아니었지만 주변이 이리 황량했나 싶을 붉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안양천으로 이어지는 평야의 끄트머리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멀리 오류광산 노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비탈에 고모집이 있다.
이젠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왔구나 싶은 마음에 발 걸음은 가벼워지는 듯 했으나 뭔가 마음 한켠 큰 구멍이 느껴졌다.
설날을 전후한 싸늘한 바람이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듯 갑자기 추위가 닥쳤다.
그러고 보니 손도 많이 시려웠다. 양손을 번갈아 가방을 바꿔 들며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긴 했지만 이 겨울에 맨 손인걸...
집이 가까워 지면서 고모가 우릴 어떻게 맞을까하는 것이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동물적인 느낌이랄까? 그런게 없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린 반겨 줄데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아버지 쪽으론 단 하나 혈육인 고모였음에도 애초 새엄마를 따라 부산으로 간다는 결정을 했을때도 이렇다 저렇다 의견이 없었던 어른들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나중 철이 든 후였다고나 해야 할지?
그때만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녹녹한 문제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엄마란 사람은 무모할만큼 용감한 결정을 했던 여인이다. 그야말로 피도 살도 안 섞인 아이들을 어쩌자고 무작정 친정으로 데리고 내려갔을꼬?
이윽고 일본형으로 지어진 고모집 정원을 거쳐 문앞에 다다랐다. "고모!" 라고 부르는데 그 소리가 어찌 목청을 타고 밖으로 튀어 나오질 않고 입안을 맴돌던지..., 몇번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 만남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릴 본 고모는 기가 막히다는 듯 그저 머리를 만지면서 '헉'하고 울었다. 이제 발 붙일 곳은 찾았구나 싶으면서도 그 멋적음이란..., 어색함은 집안으로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뻔한 물음, 뻔한 대답.
중요한 것은 이제 보다 근본적인 동생과 나의 거취를 찾는 문제가 남았다.
고모의 격한 울음 삼킴은 이제부터 겪어야 할 여러가지 복합적인 수순을 염두에 두었던 까닭이었다.
더 큰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었던 고모의 수습못하게 아픈 가슴 아픔은 그래서 반가움으로 두 조카를 끌어 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이 설날 다음날이지....? 그리곤 아마 건넌방에서 긴 잠이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