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증막 집(추억 9)
이사는 거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운천에서만 해도 2리에서 4리로 4리에서 다시 중학교 뒷편으로...
새로 이사간 한증막집은 그런대로 살만했다.
어디라서 살만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생활자체가 즐겁기가 어려운 그런 공간들이었다.
나중 그래도 식구들이 함께 있어서 행복한 공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한증막집은 운천의 중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주변에 어울려 있는 집도 없이 좀 한적하달까 외지달까, 주인집이 있는 아래 쪽으로 덩그런 한증막(황토로 만든 불화로)가 달린 집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마 처음 살아보게 된 기와집이 아니었다 싶다.
누군가의 소개로 집 한칸을 얻어쓰는 대가로 한증막이며 목욕탕 그리고 주변 시설을 청소하기로 하고 옮겨 간 모양으로 내 일과도 학교를 파하고 오면 일단은 일정 구역 청소를 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시간대가 맞지 않아선지 이미 청소는 끝나 있는 경우가 많아서 험하게 청소를 했다는 기억은 없다.
주변엔 추억할만한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 우선 도로에서 한증막으로 이어지는 긴 길에는 당시 내 키보다 큰 코스모스가 길 양편으로 영국 근위병 사열하듯 늘어서 피어있었다. 코스코스를 좋아하게 된 첫 추억의 장소였다.
그리고 코스모스 길이 시작되기 전 작은 연못은 겨울이면 아주 훌륭한 우리들이 썰매터였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들도 얼어서 외발 썰매로 좁은 얼음길을 지치는 모험스런 썰매타기도 좋은 추억이었다. 연못 끝으로 물길 치고 나간듯 움푹 패인곳은 자연 둑이 자연스럽게 연못을 바라보고 있어서 둑에 수수대를 몇개 얹고 주변의 풀들을 긁어 올리고 나면 훌륭한 아지트가 되었다.
그때 누나에게 부탁해서 날개달린 말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 그땐 용마라고 했는데, 나중엔 유니콘이었던가? - 하여튼 그래서 형과 나 그리고 주인집 내 동갑내기는 그 아지트의 용감한 용마부대원이었고, 그 아지트는 또 아주 좋은 썰매 창고이기도 했다. 어느날 우리 아지트 지붕이 몽땅 없어지는 참변을 당했는데...
집에서 땔감으로 걷어간 것으로 짐작은 가는데 그렇게 아지트를 잃었다.
어찌보면 재미있었던 짧은 기억중의 하난데,,,
우리가 그리 이사를 가게 된 것은, 졸업장은 잃어버려서 학력 인정은 받지 못했어도, 필체가 좋았던 아버지가 면사무소 임직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리 사무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일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졌던 모양이고, 이미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진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아이들로선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는데, 미군 부대서 구했다는 파란 병에 담긴 우윳빛깔 약을 드시던 걸로 보아 속에 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그때 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야 아버지를 고칠 수 있을거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한증막 집에서도 오래 있질 못했던 것 같은 것은 용마부대 기를 만들어 펄럭이던 겨울 기억이 한번 밖에 없었던 것으로 봐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극도로 나빠진 아버지의 건강은 이젠 파란 병의 물약으로 다스릴수가 없었다.
어느날 우리 형제는 땅 강아지 사냥을 나갔다.
무지한 사람들의 민간요법을 써 볼 요량에서 였다.
명치에 꼭 막힌 것을 땅강아지를 목으로 넘기면 놈이 땅을 파듯 막힌 것을 뚫고 나간다고 했다.
세상에~
땅강아지도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고, 황해도 연백을 고향으로 두고 언제고 '수복되면'을 기다리던 그 이는 끝내 먼길을 가셨다. 엄마가 가시고 나서 채 4년이 되지 않았던 어느날이었다.
그이는 그렇게 7월 칠석에 이 땅에 와서 5월 단오에 당신의 43살 생일을 다 못채우고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