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선구
변화의 선구(先驅)
2000. 6. 28
“만일 최고 경영자가 변화를 선언하면 회사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직원들이 그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 들일까?”
“아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겠지.”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환경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어. 변화에 대한 일종의 방어벽이라 할 수 있지.
그런 와중에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고자 하는 발언권이 센 사람이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너도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게 되지.”
“어떤 이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선심을 쓰기 위해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일반 조직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
선문답 같은 말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게 될 즈음이면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숨 가쁜 변화가 일견 시대적인 당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갑갑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은 아마 남의 일이 아니어서 일겁니다.
‘변화’라고 하는 것은 기실 요즈음에 대두되는 화두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도 더 나음을 추구하는 한 ‘변화’는 필연적인 화두로 등장해 왔습니다. 일찍이 경제학자 슘페터는 삶의 기반자체를 흔드는 변화의 필요를 역설한 바 있고, 그 변화의 출발은 ‘현상의 파괴’라고 말했습니다. 강조하여 말하기를 ‘파괴 중에 가장 큰 파괴가 자기 파괴’라고 주장함으로써 변화와 혁신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부터 시작하여야 함을 은연중에 강조했습니다.
모두(冒頭)에 인용한 대화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변화의 환경에 대처하는 비교되는 두 사람을 내 세워서 ‘변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또 변화자체를 내 문제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아주 짤막한 내용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업무외적인 자리에서 많은 상식을 얻고 있고, 나와 다른 차원의 높은 식견을 접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단히 행복한 주변여건을 갖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도사도 만나고, 철학자고 만나고, 교수도 만나고, 개척자도 만나고, 선구자도 만나고, 심지어 선인(仙人)들도 만납니다.
얼마 전에도 7-8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동물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접했습니다.
그 날 얘기는 철새들의 이동에 관한 얘기였는데, 철새들은 기온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네요.
그래야 일정한 고도에 오르게 되면 원하는 지역의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행을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덧붙여 자기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날갯짓을 해야 한다고 하면 수만리 길을 제대로 날아가는 새는 한 마리도 없을 거라고요...
과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저 자신도 까치가 날아다니는 양을 보면서 느낀 것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갯짓이 그렇게 힘겹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류를 타게 되면 날개의 구실은 중심을 잡고 바람을 타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이동과정에서 죽게 되고, 날개가 다 상해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장거리를 비행 하는 중에 약한 개체는 자연 도태되고 강한 개체만 살아남아 그 속성이 유전되면서 종의 번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자연의 현상에서 기업의 생리나 속성을 연상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절한 삶의 원리는 사실 자연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고’, ‘초일류’ 등이 기업의 목표로 선정될 때까지는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거지요.
요즘 청중회원 중에 몇몇 분들이 상당한 고민 중에 있습니다. 자신의 업무외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일로 인식하고 회합에 참여하는 그 분들을 보면서 ‘현대중공업의 저력’을 보기도 합니다.
현대중공업의 역사는 결국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의 모습을 유지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청중회는 생리적으로 선각과 선구와는 떨어질 수 없는 출신의 배경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리 직급의 젊은 시절, ‘경영자적인 시각으로 회사의 문제를 건의하라.’는 사명의 일부를 위임받았고, ‘젊은 층의 활기찬 제언을 경영에 반영하여 새로운 경영감각을 접목 시키겠다’는 회사의 의지를 가까이서 접한 집단이었으며,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인재로 선발된 집단‘으로서의 자부심은 시절이 조금 지나 퇴색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청중회의 정신적인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각(先覺)은 고독합니다. 선구(先驅)는 힘겹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말 달리던 선구자’가 있어서 오늘을 살 수 있었습니다. 변화의 중심에 청중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변으로부터 변화를 부르짖는 통속적 변화제창자이기보다 자신의 변화를 통해 주변을 함께 변화시켜 나가는 ‘변화 실천자’인 동시에 ‘변화 지도자’로서의 청중회를 기대합니다. 훗날 현대중공업 역사 속에서 뭔가 뚜렷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청중회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더워서 몸 추스리기도 귀찮은 어느 여름의 한 날을 택해서 변화를 주제로 삼은 얇은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청중회원들의 여유 있는 모습도 기대합니다. (청중회보 2000년 6월호 맞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