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비장애인
부끄러운 비장애인
1996. 11. 21
TV프로그램 개편 철이 되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러면서도 앞 다투어 문제성이 있는 드라마로 시청률 경쟁을 벌이거나, 엎어지고, 자빠지고, 깨지고 하는 과장된 코미디 프로가 시청자들을 우롱한다.
문외한의 입장에서 얄팍한 감정만을 가지고 전문가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편승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방송사마다 하도 많은 코미디프로가 있다보니까 제목을 외우기도 여의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 ‘웃으면 복이 와요’ 뭐 이런 대표 타이틀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고, 이경규가 진행하는 코너가 있었다. 내용은 일종의 몰래카메라 형태로 어떤 기대되는 행동이 발생되는 현장을 지켜보다가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푸짐한 상품을 전달하는 그런 프로였다.
11월 첫 주던가 - ‘늦은 밤에 사람의 통행이 없는 상황에서 교통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주제로 횡단보도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밤 10시 이후 지켜본 그 현장에서 좀처럼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새벽으로 갈 즈음 진행자는 추위에 떨고, 뭉개지는 준법질서의 현장만 계속 방송되고 있었다. 새벽 4시 무렵 흰색 승용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주춤주춤 하더니 이내 멎었다. 아마 일시 정지는 선발기준에서 무시되는 것으로 약속이 되어있던 모양인지 진행자는 “하나, 둘, 셋...” 하더니 열까지 카운트를 하고 나서는 “드디어 찾았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도로로 뛰어 나갔다. 차창을 내리고 인터뷰를 진행하려던 진행자의 표정엔 순간 놀라움이 번졌다.
그도 그럴밖에...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말하기조차 힘들게 표정이 일그러진 뇌성마비 환자였다.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그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가 더욱 더 그 사람의 틀어진 사지를 안타깝게 했다. TV에서는 그의 말을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자막을 통해 대화를 보여주었다.
진행자 : 늘 교통신호를 지키십니까?
운전자 : 예, 늘 지켜요.
진행자 : 사람이 없는 이런 시간에도 말입니까?
운전자 : 예, 늘 지켜요.
진행자 :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운전자 : 제 와이픕니다.
부끄러운 비장애인들이다. 붐비는 고속도로에서는 여전히 비상등을 켜고 갓길을 달리는 승용차들이 많고, 버스 전용차선을 버젓이 달리는 뻔뻔한 비장애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성(知性)과 양심(良心)이 지배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이다. 그러나 지성과 양심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보편타당의 당위(當爲)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공허한 소리일 때 그러하다.
가치라는 말은 ‘인간정신의 목표가 되는 보편타당의 당위’란 말로 풀이되고 있는데, 그 대상은 眞, 善, 美 따위로 하고 있다. 진실함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포장되어 나타나서는 그 가치가 없다.
역설적으로 僞善의 도가 철저하면 할수록 그것이 점점 고매한 인격에 수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진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위가 실천되기 어려운 세상이 되면 될수록, 편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될수록, 부끄러운 비장애인들이 그 부끄러움조차 모르면서 당위를 행함이 마치 보석처럼 찾아진 선행으로 치부될 수가 있다.
‘부끄러운 비장애인’은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내 사는 세상의 묘한 話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