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우 2014. 3. 26. 11:38

NATO

1996. 10. 21

어딜 가나 의사표현이 분명치가 않은 관계로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명확한 반대도 그렇다고 찬성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런 것까지는 좋은데 막상 어떤 방향이든 결정이 되고 나면 비로소 입이 열려서 반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 일에 적극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얼마든지 차선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따이한’이라고 해서 맹위를 떨쳤다고는 하는 데 이것이 그다지 명예스러운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의 말이다.

적군을 향해 용맹스럽게 돌진을 해서 얻은 전과로 얻은 명성이라기 보다는 처절한 잔인성에서 얻은 오명이라는 지적이다. 이유인즉 작전을 나간 마을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베트콩이 없단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베트콩들의 기습을 당하고 보니, 베트콩을 찾기보다는 온 마을을 ‘싹쓸이’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늘 그렇기야 했겠는가 만은 사실 그런 일이 있었음직도 하다. 피아(彼我)가 구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도적인 견지의 선택이론이 적용될 수가 있었겠는가?

최근 ‘애인 신드롬’이라 할 만큼 MBC의 월화 드라마 애인이 난리를 떨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30-40대 유부녀 가운데 ‘너 애인 있니?’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고도 하고, 국회에서까지 말썽이 났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보수성향의 기성세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줄거리로 구성된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윤리기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이런 드라마는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시청률이 오르고 있다고 하니 기현상이다. 그도 신세대의 가치관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신세대의 성 개념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설문결과가 눈길을 끈다. 최근 모 방송사가 결혼 적령기의 예비 신랑, 신부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보자.

혼전 순결이 결혼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가?

- 크게 개의치 않는다 : 80%

-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20%

그런데 이 결과는 어디까지 남의 이야기 일뿐 자신이 실제 그런상황에 직면한다면 심각하게 고려하겠다는 대답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한편, 얼마 전 한 여론기관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18-29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남성과 여성 모두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다음과 같다.

- 전적으로 동의 : 63.2%

- 동의하지 않는다 : 26%

위 두 가지 설문결과를 게재하면서 신문은 ‘튀는 신세대, 성 의식은 구세대’, ‘내 짝만은 안돼요’라는 제목을 달았다. 참으로 적절하게 제목을 뽑았다.

다시 ‘애인’으로 돌아가자.

어느 짓궂은 기자가 ‘애인’ PD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대답인즉 ‘어림 반 푼 어치 없습니다.’

개방이고, 포용이고, 관용이고 간에 그게 남의 일 일 때 얘기인 모양이다. 정작 내 일로 다가오면 결과는 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걸 뻔히 알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가장 이 시대를 반영하는 가치관인양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NATO는 우리가 배우기로는 ‘북대서양 조약기구’로 알고있는 말이다. 그것이 최근에는 집단심리를 일컫는 용어로 등장했다. 소위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집단 심리를 지적하는 말이다. 뒤에서 잔소리만 한참 하다가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되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회색집단을 일컬음이다. ‘No Action Talking Only’ 의 이니셜이다.

화제가 만개할 때는 모두가 해결자연 하면서도 항상 스스로를 별개 집단 속에 안주시키려는 그런 유형이다.

이런 말을 할 때도 여전히 ‘나 만은 그렇지가 않은 사람’ 중에 NATO가 개재할 확률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같이 생활하는 이 조직 안에서 맘 터 놓고 빛깔을 구분할 수 없는 분위기가 무성해 진다면 - 그건 병든 조직이다. 심각한 대기업 병이다.

물론 사람마다 회사 사랑하는 마음이 각기 다를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한 목소리를 낼 때는 흑백의 분명한 논리를 가려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무성하지 않게 된다. 조금은 돌더라도 공존의 길을 택해 가야 할 것이다. 때론 질러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일들로 우리는 ‘나름대로의 계산논리만 앞세우면서, 오히려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과오’를 여러 번 경험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