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겨우 바라보고 존재하는 슬픔
사람 사는 것이 별 것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그렇다고 그 생각이 곧 달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어서 매일 매일 더 커져가는 인생의 중력을 느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겨우, 겨우…, 오늘 소개하는 시 전체를 통해 이제 막 턱걸이 열개하고 다시 한 개 쳐 올리려고 목 들어올리고 바들바들 떨며 철봉대에 매달린 중학생의 체력장 장면이 떠 오릅니다. 그건 자기의 경험 역에 있어 아직 기억을 지배하는 자신의 모습이겠지요.
어젠 나보다 더 요즘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퇴근 후 짧은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위로도 격려도 그렇다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눈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주 앉아서 30년 넘은 직장 생활을 얘기하고, 그 기간 평가 받으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볍게 실망도 해보고…
그인 1977년부터 근무를 했다고 하니까 벌써 37년 세월을 이 회사와 함께했겠네요. 그 긴 세월 왜 좋은 일이 없었고, 왜 기억에 남을 추억거리가 없을까요 만은, 가장 최근 시제의 생생한 기억이 통틀어 과거라고 하는 기억의 존재를 싸 안아버립니다. ‘형편없는 것들’로…
담당 중역 면담을 했다고 하네요. 예서 머지않은 곳(양남)이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고량주 한 잔을 털어 넣더니 “농사나 지을까?” 그러데요.
“고향이야 가까우니 그렇다고 합시다만, 그곳엔 땅이 있고, 피붙이가 아직 살고 있소?” 물었더니, 고갤 좌우로 흔들어요.
“그래도 친구들이야 몇 몇 있으니 술친구 왔다고 반기겠지요.” 다시 한잔을 남김없이 털어넣었습니다.
이젠 대가리에 피 마른 아들아이는 그런 아빠의 심정을 남자 대 남자로 이해하는 모양인 듯, “그간 수고하셨으니 정리하세요.”라는 격려를 한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평생의 반려자는 “용 빼는 재간 없으면 그저 직장 나가라.” 고 한답니다.
결코 이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사내와 마주앉은 사내도 “왜 이리 쓸까?”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거퍼 고량주 잔을 기울였습니다.
팔보채가 다하고, 짬뽕 국물 안주 삼아 한 병 고량주 바닥을 말린 두 사내는 식당을 나와 그들의 평소 하던 버릇대로 각각 길을 택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요.
아마 가는 길 내내 “겨우 존재하는 자신”을 보고 또 보고 그랬을 겁니다. 그리곤 다시 맞은 아침이네요.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하 (1963∼ )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가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는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있는, 바스러질 듯 연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담은 시다. 우주는, 세계는, 중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세상을 두루 이루는 건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찬찬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의 망막에 맺힌'(유하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자서에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이, 그것을 그리는 시인의 마음이 독자 가슴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린다.
어쩌면 이들 역시 겨우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는, 고아, 홀몸노인, 노숙인 들의 안부…어떨지, 문득 그들 겨울의 애절(哀切)이 사무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