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겸손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겸손이 아닙니다.
인생 나이 이만하니 이젠 주변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할만한 연륜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저 좋다’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옮기는 동경(銅鏡) 이란 시는 그저 읽고 해석하기에 좀 난해함이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시 평을 하는 이들의 마음 속엔 아마 서정의 액이 넘쳐서,
시인들이 쓰는 그들의 말과 그들이 단어 그리고 그들의 정서를 둥글게 말아서 몇 바퀴 그 들의 마음가운데 넘치는 액을 듬뿍 발라 싸 안고 부딪기를 몇 번 하면,
진주 빛 시어들의 원 뜻이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그저 놀라고 말려고 합니다. 오늘은…
대인!
어제 통화한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들으신 걸로 아네.
뭔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인 것으로 판단되네. 공교롭게도 시점을 그리 맞은 것으로 아시면 싶네.
▲ 동경(銅鏡)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 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1972~ )
△ 시는 언어 속에 내장된 사유가 좀 더 극단적으로 외침이 된 형태이다. 이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에 감각된 어떤 질감을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것을 초능력으로 비한다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일 수 있겠다. 사이코메트리란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혼을 계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인데, 대개 이재훈의 시가 성립되는 방식이 그렇다.
깨진 기왓장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취했을 뿐인데 발화자는 기왓장과 함께 살다간 여인을 손의 촉감만으로 재구성한다. 손끝으로 뭉개진 얼굴을 지나 그네를 타고 노니는 소리의 운동성을 느끼고 잃어버린 신발, 보랏빛 옷의 감촉까지. 여인을 둘러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주머니 속에서 종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오래된 거울에서 살다간 이미 지워져 버린 삶의 기록들이자 주변의 역사들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생애의 파편들이다.
그가 자주 태초의 시공간을 자신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고, 소멸해간 것들을 호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근대 시스템이 가진 폭력을 자신의 초능력으로 일격에 무너뜨리고, 또 회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픈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의 시를 읽는다. 그에게는 시원(始原)이 있고, 자주 나의 손을 베이게 해 왜 아픈지 또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