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급래(추억5)
돌이켜 돌아가고픈 과거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후회없이 주어진 세상에서 내 역할을 잘 끝내고 갈 수 있는 복된 입장이 하나 있을 수 있겠고,
과거 여행을 한다고 해도 어느 특정역을 정해 내려 다시 보고픈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이 없어서 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긴 해도 정작 죽음의 순간에야 애절하게 삶의 연장을 바랄수도 있겠지요만.
아마 늦은 장마였던지 연일 비가 내렸습니다. 적게도 오고, 많이도 오고.
한 날 전도사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이동편으로 갔는지 모르겠고, 우리 남매들은 모두 병원에 모였습니다.
큰 건물을 지나 돌 징검다리를 지나서 하얀 색으로 칠한 작은 건물로 갔지요.
엄마는 끝내 심한 체증으로 알았던 그 병이 심해졌고, 차마 두고 가지 못해 안타까웠을 인연을 끝냈습니다.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병원에 오신 고모부가 하루 전인가 이틀전인가 서울로
전보를 쳤다고 했습니다. 짧은 단어였지요. "위독급래" 그 후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위독을 알리는 전문으로 기억이 남았습니다.
목을 타고 계속 목소리를 잠기게 하는 심한 울음을 참으면서 전도사님의 인도에 따라 찬송가를 목청껏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될 일인 것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슬픈 찬송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날짜가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 큰 건물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반가워야 할지 슬퍼야 할지 모를 짧은 순간 주변의 아는 분을 통해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아버지의 손을 떠난 누런 봉투에서 복숭아같은 과일이 병원 바닥을 굴러 흩어졌습니다.
그 뒤의 일들은 가끔 엄마가 누워있는 그 작은 병원 건물에 모여 다시 찬송을 부르고, 슬펐고...,
그리곤 버스에 실려 비오는 산길을 잠시 걸어 엄마가 이제부터 오랫동안 쉴 장소로 이동을 했습니다.
할머니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짧은 인천 생활의 기억은 내 3학년 1학기 학교 기억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