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2 : 제곱의 법칙 (6) 늦은 임신과 이른 죽음
E=mc2 : 제곱의 법칙
(6) 늦은 임신과 이른 죽음
샤틀레는 연구 발표후 가족의 재정도 돌보고 다음 번 연구 주제를 고민하기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녀는 볼테르와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베르사유에 있는 새 세대의 조신들이 그녀가 유럽 근대 물리학의 뛰어난 해석자 중 한 사람이며, 또 여가 시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버질*의 작품을 번역하여 출간한 장본인임을 모르는 것에 대해 재미있어 했다. 그녀가 가끔씩 도박판에서 한바탕 확률을 계산해 내면,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시레이로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즐거운 이 은신처 안에’ 라임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볼테르에게 채소밭을 꾸며도 된다고 허락하고 한 친구에게 급히 편지를 썼다.
“나 임신했어. 너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내가 내 건강을 두려워하는지, 내 생명까지도. 나이 마흔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1749년 4월 3일
시레이의 별장에서
임신은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혼 직후에도 아이를 가졌었다. 그때는 20세나 어린 나이였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당시에는 나이 들어 임신할 경우 살아남을 확률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시대의 의사들은 손이나 도구들을 씻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감염을 치료하는 항생제도 없었다. 오늘날처럼 자궁 출혈을 조절하는 약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대의 무능력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저 볼테르에게 자신이 아직 준비되기 전에 떠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녀 앞에 남아있는 시간은 확실했다. 출산 예정일은 9월이었다. 그녀는 매일 오랜 시간 동안 연구에 몰두했다. 남은 시간 안에 연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으므로 책상에 놓인 초들은 종종 새벽녘까지 타오르곤 했다.
1749년 9월 1일 샤틀레는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서류 꾸러미를 보냈다. 그 동안 자신이 뉴턴에 대해 연구해 온 주요 해석들의 완성본을 동봉한다는 글과 함께. 3일 후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무사히 출산을 했지만 감염으로 일주일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볼테르는 슬픔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반을 잃었다. 나는 그녀의 영혼을 위해 존재해 왔다.”
그 무렵 mv2에 비례하는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물리학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다. 사랑했던 여인의 유산을 세상에 전하는 볼테르의 논증 능력은 그녀의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지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로 다음 세기에 페러데이**와 과학자들은 그녀의 이론을 채택했다. 형태의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양적 개념의 mv2을 모든 에너지의 보존 가능성 개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채택했다.
샤틀레의 분석과 연구 논문은 과학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진전이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업적은 잊혀졌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대단한 연구진을 감독해 내고 그 후 계속해서 사상 체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하기가 그다지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보더니스 ‘E=mc2’에서 발췌)
발랄했던 한 여인의 이른 죽음과 그녀가 본능적으로 보여주었던 과학에의 정열 앞에 숙연할 따름입니다. SMLee
버질*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라틴어: Publius Vergilius Maro 푸블리우스 웨르길리우스 마로, 영어: Vergil 버질, 기원전 70년 10월 15일 - 기원전 19년 9월 21일)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시인으로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그를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의 만투아(Mantua, 현재 만토바 Mantova) 근교의 안데스(Andes)에서 태어나다 (출생시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갈리아 알프스 이쪽 지역, 즉 이탈리아 북부)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Magia Polla)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는 라틴어의 virga (어린나무)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라는 명칭이 (현재 영어나 프랑스어의 표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재 밀라노)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집으로 <시선> <농경가> 등이 있다.
페러데이**
마이클 패러데이 (영어: Michael Faraday, 1791년 9월 22일 ~ 1867년 8월 25일)는 전자기학과 전기화학 분야에 큰 기여를 한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이다.
패러데이는 직류 전류가 흐르는 도체의 자기장에 대해 연구하여 이에 대한 기초를 세웠다. 그는 전자기유도, 반자성 현상, 그리고 전기 분해를 발견했다. 또한, 자성이 광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과,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립했다. 그가 발명한 전자기 회전 장치는 전기 모터의 근본적 형태가 되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전기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자로서, 패러데이는 벤젠을 발견했고, 염소(Cl)의 격자무늬 수산화물에 대해 조사했으며 초기 형태의 벤젠 버너, 산화 상태들의 체계, 그리고 양극, 음극, 전극, 이온과 같이 널리 쓰이는 전문 용어들을 발명했다.패러데이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과학연구소의 화학 Fullerian Professor이 되었고, 그의 인생 동안 그 위치에 머물렀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제본사의 수습공으로 일하게 된다. 패러데이는 당시 부유층들만 가질 수 있던 책을 주인이 찾아가기 전에 읽기 시작하며 꿈을 품게된다.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20살이 되던 어느 날 그에게 과학자 조수를 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했지만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험을 수없이 되풀이 하면서 이유를 찾아나갔다. 그러던 끝에 자기력을 전기로 바꿀 수 있는 전자기유도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패러데이는 비록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적분학과 같은 고등수학은 일부밖에 알지 못했지만, 그는 역사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자중 하나다. 몇몇의 과학사학자들은 그를 과학역사상 최고의 실험과학자로 불렀다. 전기용량의 SI 단위계 단위인 ‘패럿’은 패러데이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인데, 1 몰의 전자가 가진 전하량을 뜻한다. (약 96,485 C.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서 1F = 96500C 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패러데이의 유도 법칙은 기전력과 시간당 자기선속의 변화량은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러데이는 인격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로도 손꼽힌다. 그는 실험을 통해 수많은 발견을 해냈지만 이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특허권과, 크림전쟁을 위한 무기 개발도 거부했다. 그의 업적을 인정한 영국 왕립 연구소는 회장직과 함께 호화 저택, 기사 작위를 준다고 했으나, 이도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영국 정부가 그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뉴턴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자격이 있다'며 당시 귀족들만 묻힐 수 있었던 묘지를 지정해주었으나, 그는 작은 공동묘지에 묻히길 원한다며 이 마저도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우지 못해 꿈도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과학강연을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청원을 했다. 결국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1실링에 불과한 돈만 받고 강연을 하며 많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아인슈타인도 그를 존경하며 실험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저서《촛불 속의 과학이야기》
– 출전 : 위키백과 –